× PC버전 구독관리
공개일기 한줄일기 내일기장
티아레
 사랑에 대한 칼 융의 아포리즘에서   심리학
조회: 3938 , 2012-08-05 20:52

"사랑은 신과 같다. 이 둘은 가장 용감한 종에게만 모습을 드러낸다."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우리는 기독교 최고의 비밀에서 시작해, 그 다음의 낮은 단계로 오리게네스의 "하나님의 사랑", 스피노자의 "하나님의 지성적 사랑", "플라톤의 "이념적 사랑",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만난다. 괴테의 다음 시에서 우리는 인간적인 것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모든 성난 행동과 함께
이제 거친 충동은 잠들고,
인간의 사랑이 싹트네,
이제는 신의 사랑이 싹트네.

인간적 사랑의 영역에서 우리는 연민의 색채을 띠고 있는 기독교적 불교적 이웃 사랑, 박애나 복지와 만나며, 조국에 대한 사랑이나 교회처럼 이상적인 공동체를 향한 사랑과도 만난다. 여기에 부모의 사랑, 특히 어머니의 사랑과 자녀의 사랑이 더해진다. 그리고 연인간의 사랑은 정신의 영역을 떠나 정신과 본능 사이에 펼쳐진 중간 영역으로 들어간다. 이 중간 영역에서는 순수한 에로스의 불꽃이 성性의 열정으로 타오르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부모에 대한 사랑, 조국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과 같은 이상적인 형태의 사랑이 개인의 권력에 대한 욕구나 소유욕, 지배욕과 함께 섞여 있기도 하다.

그러나 본능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이 모두 품격의 저하를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사랑이 지닌 아름다움과 진실은 본능이 함께 할수록 더욱더 완전해질 것이다. 단, 본능이 사랑보다 우세하다면 동물적 본성이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연인간의 사랑은 괴테의 시에서 말하는 사랑일 수 있다.

매우 강한 영적인 힘이
요소들을
끌어당기면
어떤 천사도
진실한 애정으로 하나가 된
두 사람을 떼어놓지 못한다.
영원한 사랑만이
둘을 갈라놓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이 항상 그렇지는 않다. 니체의 표현대로 "두 마리의 동물이 서로 교접"하는 동물적 본성의 사랑일 수도 있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사랑은 더욱 심각하다. 비록 연인의 사랑에 약혼식이나 공동의 삶에 대한 엄숙한 의식은 없을지언정 운명과 비극의 또 다른 아름다움이 그 사랑을 빛나게 할 수도 있다. /


"저급한 욕망"이든 정신적인 애정이든, 경험상 사랑은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운명의 힘이다.
사랑은 인간사를 좌우하는 가장 강력한 추진력 중 하나이다.

사랑을 "신적神的"이라고 이해한다면 매우 적절하다.
예부터 정신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을 "신神"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신을 믿든 믿지 않든, 놀라워하든 저주하든지 간에 "신"이란 단어는 늘 우리 입에서 튀어나온다.
언제 어디서든 정신적으로 가장 강력한 것을 우리는 "신"과 같은 어떤 것이라고 부른다.
이때 신은 인간과 대립하며, 명확히 구분된다. 물론 신이나 인간은 모두 사랑을 공유한다. /


"사랑"은 나이에 상관없이 항상 중요한 문제이다.
어릴 때는 부모의 사랑이,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어서는
그가 사랑으로 무엇을 만들었는지가 중요하다. /


나는 그대가 사랑의 모든 문제를
하느님의 은총을 통한 기적이라 믿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기적은 근본적으로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다.
사랑의 뿌리를 결코 다 밝혀내지 못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운명이다.
신의 행위로 인해 인간이 혼란에 빠져서는 안된다.
사랑의 현상이 지닌 숭고한 무의미 또는 무의미한 숭고함은 우리에게
철학적인 놀라움을 갖도록 할 수도 있다. 


사랑의 문제가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면 당신의 말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에 관해 말하는 것 역시 매우 어려운 일이다.
사랑이 크고 강한 것을 불러 일으킬 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사랑에 대한 두려움, 일종의 경외심을 갖는다. 

내 모든 경험상 사랑은 거의 다 올라갔다고 생각했을 때 더 높이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산과 같다. /


사랑이 개인적 문제라는 말은, 개인적 관점에서는 일반적인 판단 기준이나 표준이 타당성을 잃는다는 의미다. /


세계는 모든 사람에게 무한한 기회를 준다. 인간에게서 그의 가능성을 박탈하는 것은 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에 대한 그의 무능력이다. 그의 리비도Libido*를 사물과 인간에게 향하도록 하고, 그것을 자신을 위해 활기차고 아름답게 만드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이 세상은 공허하다.

우리 자신으로부터 대체물을 만들도록 강요하는 것은 대상의 외부적인 부족이 아니라, 우리 밖에 있는 것을 사랑하면서 감싸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이다. 물론 삶의 여러 상황이나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오는 어려움은 분명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그러나 외부 상황이 아무리 어렵다하더라도 사랑을 방해하지는 못하며, 오히려 사랑을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하도록 우리를 격려한다. 현실의 어려움은 리비도를, 예를 들어 신경증이 생길 만큼 그렇게 지속적으로 억누를 수 없고, 신경증의 원인이 될 만큼의 갈등도 없다.

원치 않는 것을 원하는 것에 대립시키는 저항抵抗 만이 심인성 장애의 출발점이 되는 퇴행을 일으킨다.
사랑하는 것에 대한 저항은 사랑할 능력을 없앤다. 혹은 그런한 무능력은 다시 저항으로 작용한다.
리비도가 현실의 세계로 흘러가는 넓은 강물에 비유되듯이, 저항도 역동적으로 보면 강바닥에 솟은 바위처럼 물을 우회하도록 하거나 바위를 넘어 흘러가게 하지 않고 아예 수원으로 거슬러 되돌아가게 만드는 역류와 같다. 심혼Seele**  외부 객체를 원하지만, 다른 일부는 공기처럼 가벼운 환상의 궁전이 손짓하는 주관적 세계로 되돌아가고자 한다.

* 리비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는 주로 성욕, 성적본능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융은 리비도를 정신적 에너지라는 개념으로 사용했다. 융은 물리학에서의 에너지 개념과 마찬가지로 정신의 에너지를 대극對極(예를 들면, 따뜻함-추움, 높음-낮음)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으며, 두 대극 사이에는 자연적인 낙차가 있어 한 극에서 다른 극으로 리비도가 옮겨갈 수 있다고 했다. 즉, 의식에서 에너지가 상실되면 에너지는 무의식으로 들어가고(이를 퇴행이라고 함) 무의식에서는 그 에너지의 내용, 콤플렉스, 원형 등에 활기가 생겨 강력한 자신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는 다시 의식 속으로 밀치고 들어오려 하며, 창조적 충동이나 환상 또는 정신적 장애나 증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융은 리비도를 생명의 에너지, 혹은 신神적인 기氣(프노이마pneuma)로 보았고, 이 리비도의 전위轉位, 전화轉化, 변환, 변형을 통해 창조적인 활동이 일어난다고 했다.


**심혼心魂 
그리스어에서는 정신·입김·숨, 라틴어에서는 아니마·입김·숨 등을 뜻하는 것으로 영혼 또는 마음으로 번역된다. 관용적 의미로 사용되는 심혼은 비밀에 가득 찬 의식 ·무의식의 활기찬 에너지를 가리키며, 숨쉬고 움직이고 느끼고 생각하며 직관하는 개체의 존재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과거 어떤 문화권에서는 심혼이 미세 물질의 특성을 갖고 있으며, 이것이 일시적으로 육체에 혼을 불어넣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심혼이 육체을 떠나면 그 육체는 죽은 것이라고 믿었다. 또 기독교나 유대교에서의 심혼은 신이 인간에게 입김을 불어넣어 숨을 쉬게 한 본질이며, 이 본질은 육체나 영으로 바뀔 수 없는 개체로 죽음으로도 폐기되지 않는다고 여겼다.
융은 정신과 심혼을 구분했는데 모든 의식적 ·무의식적 과정의 총체를 정신이라 했으며 심혼은 사람들을 어떤 인격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다시 말해 범위가 정해진 기능복합체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내면의 인격인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이에 해당된다.


사랑의 문제는 인류가 겪고 있는 커다란 고통이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사랑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평범한 이성과 건강한 오성, 그리고 "상식"의 결집으로서의 과학이 미치는 범위는 분명 상당히 넓다. 그렇다 해도 가장 평범한 현실이나 평균 수준의 정상적 인간성의 경계선은 넘지 못한다. 이것들은 근본적으로 마음의 고통이나 그 고통의 가장 심오한 의미에 대해서는 답을 주지 않는다. 정신신경증이란 궁극적으로 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심혼의 고통이다.

그러나 이러한 심혼의 고통에서 모든 정신적인 창조와 정신적 인간의 진보가 유래하며, 고통의 이유는 정신적으로 멈춰 있는 상태, 즉 심혼이 결실을 맺을 수 없는 데 있다.

의사는 이를 인식하면서 매우 조심스럽게 이러한 영역으로 다가간다. 여기에서 치유의 가설, 다시 말해 병의 정신적 의미를 전달할 필요성이 의사에게 대두된다. 왜냐하면 환자는 이성이나 과학이 줄 수 있는 그 모든 것 저편에 있는 바로 그것을 의사에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환자는 자신을 감동시키고, 자신이 겪고 있는 신경증적인 마음의 혼란에 의미있는 형태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을 찾는다.

과연 의사가 이 과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우선 의사는 환자더러 신학자나 철학자한테 가보라고 하거나, 어찌할 바를 모르는 우리 시대의 조류에 환자를 내맡긴다. 의사는 물론 전문가로서의 양심 때문에 세계관을 가져야 할 의무는 없다. 그러나 무엇이 환자를 병들게 했는지, 환자가 사랑 없이 성욕만을 갖고 있고, 맹신이 두려워 믿음을 갖지 못하며, 세계와 삶에 환멸을 느끼기 때문에 희망을 갖지 못하고, 자신의 본래 의미를 인식하지 못했기에 통찰할 수 없다는 것을 의사가 분명히 알게 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고등교육을 받은 많은 환자들은 신학자를 찾아가는 것을 무조건 거부한다. 철학에서 감동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철학자로부터 아무것도 들으려 하지 않느다. 철학의 역사는 그들을 냉담하게 만들고 철학의 주지주의는 그들에게 사막보다 다 황량하다. 그렇다면 의미에 관해 말하는 것뿐 아니라 의미를 갖고 있는 위대한 삶의 방식, 세계를 살아가는 방식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환자의 삶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 즉 "믿음, 희망, 사랑 그리고 인식"을 줄 만한 어떤 하나의 체계나 진리를 생각해낼 수 없다.

인간이 애써서 얻은 이 네가지 가장 고귀한 성과는 가르칠 수도 배울 수도, 줄수도 받을 수도, 그냥 얻을 수도 벌어들일 수도 없는 은총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한 비합리적 조건, 즉 체험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체험은 결코 "만들어질 수" 없다. 체험은 그냥 일어나는 것이며, 이러한 체험 가까이에 이르게 하는 길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길을 선뜻 "방법"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방법"은 삶을 억제하는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체험의 길은 기교라기보다는 전체 인격의 무조건적인 전력투구를 요구하는 모험이다.

이로써 치료의 필요성은 의문을 낳고, 동시에 극복하기 어려워 보이는 장해가 된다. 어떻게 하면 고통받는 마음을 구제하는 체험을 하도록 도울 수 있을까? 이 체험은 신에게 받은 네 가지 위대한 권능이 고통받는 마음에 귀속되게 하고 그들의 질병을 치유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환자에게 친절하게 충고할 것이다.
"참된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혹은 "진실한 믿음, 진정한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아니면 "너 자신을 알라" 라고. 그러나 나중에야 얻을 수 있는 그 체험을 환자는 어디에서 미리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사도 바울이 회심한 이유는 진정한 사랑이나 진정한 믿음, 또는 다른 어떤 진리 때문이 아니었다. 오직 기독교인에 대한 증오만이 그를 다마스쿠스로 떠나게 했고, 결국 그의 삶에 있어 결정적인 체험을 하게 했다. 그는 확신에 차서 최악의 그릇된 길을 걸었고, 그 삶이 그를 체험에 이르게 했다.

여기에서 사람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삶의 문제가 드러난다.
그리고 심의(정신과 의사)에게는 사제직과 가장 밀접하게 협력해야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


현대를 사는 여성들은 사랑하고 있을 때에만 자신들의 최선과 최고를 실현시킬 수 있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의식하게 되었다. 이것을 앎으로써 여성은 사랑이 법을 뛰어넘는다는 인식에 이르렀다. 이와는 반대로 개인의 체면 때문에 "사랑이 법을 뛰어넘는다"는  인식에 대항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일반적인 견해를 동일화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사소한 해악이다. 더 큰 해악은 이러한 일반적 견해가 그녀들의 골수에 박혀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 견해는 내면의 소리, 즉 일종의 양심으로서 다가온다. 그것이 바로 그녀를 꼼짝 못하게 하는 힘이다.

여성들은 자신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특성이 역사와 충돌할 수 있으리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했다. 개인적인 특성과 역사가 서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은 그녀들에게 가장 예기치 못했던 문제요, 또 가장 어리석은 부조리다. 그러나 누가 완벽히 알 수 있단 말인가. 역사가 두꺼운 책 속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피 속에 들어 있음을! 아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아마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여성은 사랑한다면 바로 그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러나 일을 사랑하고, 의의가 깊은 일을 수행하는 여성은 드물다. 왜냐하면 이는 여성의 본성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일에 대한 사랑은 남성의 특권이다.

그러나 인간은 본능적으로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을 통합하기 때문데 남성은 여성적인 삶을, 여성은 남성적인 삶을 살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여성에게 남성적인 면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반대 성의 삶을 살게 되면 원래의 성은 희미해저 피해를 입는다. 그러므로 남성은 남성으로서, 여성은 여성으로서 살아야 한다.

사랑을 하는 여성은 온갖 강대한 권력이나 역경에 맞서서 자신의 사랑을 지켜낼 수 있고, 혼돈 속에서도 확신을 갖고 견딜 수 있다. /


죽음을 방지할 약이 그 어디에도 없듯이, 인생이란 본래 어려운 것으로 그 어려움을 쉽게 만들 간단한 방법은 없다. 다만 상응하는 만큼의 에너지를 소비함으로써 중력重力을 상쇄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사랑의 문제를 해결할 때마다 전체 인간이 도전을 받는다. 전체가 이루어지는 곳에서만 만족할 만한 해결이 있다. 그 외의 것들은 모두 불완전하고 쓸모없다.

자유로운 사랑은 인간이 최고의 도덕적 성과를 이루었을 때에야 비로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자유로운 사랑에 대한 생각은 최고의 도덕적 성과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어려운 것을 쉽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사랑은 깊고 진실한 감정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단지 기분일 뿐이다. 진정한 사랑은 늘 지속적이며 책임있는 관계를 맺도록 한다. 그러나 사랑은 선택을 위해서 자유를 필요로 하지 성취를 위해서 자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모든 참되고 깊은 사랑은 희생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가능성, 더 적절한 표현으로 자신에게 가능성이 있다는 환상을 희생시킨다. 이러한 희생이 없다면 우리의 환상은 깊고 책임감 있는 감정이 실현되는 것을 방해하고, 진실한 사랑을 경험할 가능성은 점점 멀어지게 된다.

사랑은 종교적 신념과 한 가지 이상의 공통점을 갖는다.
다시 말해서 사랑은 무조건적인 태도를 요구하며, 완전한 헌신을 바란다.
신에게 온전히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신의 은총을 향유하게 되는 신앙인처럼, 사랑은 조건 없이
감정을 헌신하고 신뢰할 수 있는 자에게만 최고의 신비와 기적을 보여준다.

조건 없이 감정을 헌신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기 때문에 아주 소수의 인간만이 그것을 이루었다고 자처할 수 있다. 신뢰하고 헌신하는 사랑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므로 쉽게 만들 수 있는 사랑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사랑의 고난이 무서워 뒷걸음 치는 자는 그의 연인에게는 좋지 않은 기사騎士이다. 사랑은 신과 마찬가지여서 그 둘은 모두 가장 용감한 종에게만 모습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