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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우시절 > - 이동진 영화리뷰   공개
조회: 4983 , 2010-01-10 16:16
리뷰] ‘호우시절’-좋은 사랑은 때를 안다








[이동진닷컴] (글=이동진) 그러니까, 모든 문제는 시간이다. 시간의 질은 사랑의 능력을 과장하고, 시간의 양은 사랑의 방식을 교란하며, 시간의 속도는 사랑의 한계를 강화한다. 세월의 격랑 속에서 사랑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내리는 비는 시절을 알까. 그리고 사랑은 때를 알까.


중국 청두로 출장을 간 건설회사 직원 동하(정우성)는 미국 유학 시절 친구 메이(고원원)와 우연히 재회한다. 추억을 떠올리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예전의 애틋한 감정을 되살리며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짧은 출장 일정이 끝나고 공항에서 헤어져야 할 순간이 되자 동하는 메이 곁에 좀더 머물기 위해 귀국을 하루 미룬다.


‘호우시절’(10월8일 개봉)은 허진호 감독의 다섯번째 영화고, 다섯번째 멜로다. 지난 10여년간 뛰어난 솜씨로 충무로 멜로의 가장 깊은 골을 파고 가장 높은 탑을 쌓아온 그는 언제나 사랑을 시간이란 변수 속에 넣고 관찰한다. 허진호의 영화들에서 연인들이 위기를 겪게 되는 것은 사랑을 넘보는 경쟁자 때문이 아니다. 그 사랑이 시간의 벽에 부딪치거나(‘8월의 크리스마스’), 시간의 늪에 빠지고(‘봄날은 간다’), 시간의 톱니에 갈리거나(‘외출’), 시간의 바람에 풍화되기(‘행복’) 때문이다.


이번엔 시간을 압축했다. 3박4일. 재회 초반 “그때 우리가 사랑했을까”를 장난치듯 되묻던 연인들은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면서 “지금 우리가 사랑할 수 있을까”를 간절하게 질문한다. 그리고 축약된 시간은 언제나 격정에 기름을 붓는다. (그 불길이 가장 거세게 타오를 때, 허진호 감독은 그의 작품 세계에서 예외적인 핸드 헬드 카메라까지 동원한다.)


이 영화는 허진호 감독 작품들 중 가장 밝고 가벼우며 유머러스하다. 여러 측면에서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비포 선셋’을 떠올리게 하는 이 정갈하고 깔끔한 소품은 흡사 단편 같은 호흡으로 쭈욱 밀고나간다. 인물의 전사(前史)는 만만찮게 어둡지만, 그 어둠이 설핏 드러나는 순간에조차 영화는 진창에 발을 넣지 않는다. 인물들은 시종 사랑스럽고 대화는 대부분 유쾌하며 화면은 비가 오는 순간조차 따뜻하다. 사람은 그가 사랑하는만큼만 선할 뿐이라고 허진호의 멜로들은 말한다. ‘호우시절’의 막 달아오른 연인들은 그렇게 선하다.


이 작품의 제목은 두보의 시 ‘춘야희우’(春夜喜雨)의 첫 구절(好雨知時節-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에서 따왔다. 아닌 게 아니라, ‘호우시절’은 가을보다 봄에 더 잘 어울리는 분위기를 갖고 있다. (실제로 4월에 촬영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이건 긴 겨울을 지내고 새 봄을 맞는 사랑 이야기다. 후반에 등장하는 고비도 겨울을 예고하는 늦가을의 추위라기보다는, 결국은 오고야 말 봄을 치장하는 꽃샘추위 같다.


대나무숲이 인상적인 두보초당과 팬더의 재롱이 담긴 팬더기지공원에서 아이들이 바람개비를 날리는 콴자이샹즈거리까지, 화사하게 찍어낸 청두의 풍광은 그곳으로 떠나는 휴가를 계획하고 싶게 만들 정도로 인상적이다. 그리고 멋진 외모를 가진 남녀 배우가 잘 갖춰진 공간 속에 들어가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 자체로 기분 좋은 일이다. 정우성은 청년의 낭만과 소년의 장난기를 함께 드러냈고, 중국 배우 고원원은 청신하고 투명한 모습으로 사랑의 설렘을 체화했다. 비중이 큰 조연으로 등장하는 김상호는 사람 좋고 눈치 없는 남자 역을 맡아 제 몫을 다했다.


이 영화는 청두에 도착하기 직전, 기내에서 시계바늘을 돌려 시간을 맞추는 동하의 모습을 첫 장면에서 보여준다. 결국 ‘호우시절’의 연인들은 기꺼이 시계바늘을 돌려 사랑의 시차를 넘으려는 의지와 용기를 갖춘 사람들인 것이다. 그러니까, 좋은 사랑은 때를 안다. 아니, 때를 아는 것이 좋은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