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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아레
224. 티아레 공개 2013-08-04 09:31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
- 화엄경

223. 티아레 공개 2013-07-29 00:08
사람들은 연금술서가 단지 화학이 발달하기 전의 사이비 과학서라고 생각했고 그 내용이 황당무계하여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융이 이것을 발굴해서 그 상징적 의미를 밝히자 갑자기 많은 연구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융은 겉보기에 매우 이해하기 힘든 연금술의 자료들을 살피는 가운데 연금술사들은 한편으로는 실험실에서 실제적인 화학작업을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부분적으로 의식적인, 그리고 부분적으로 무의식적인 심리학적 과정을 투사하여 그것을 물질의 변환과정에서 보았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연금술사들이 지향하는 최고의 물질, 즉 메르쿠리우스(Mercurius)는 표면상 글자 그대로 수은(mercury)을 말하지만 내적으로는 물질 속에 숨겨진 또는 붙잡혀 있는 세계 창조의 혼(Geist)이다. 그 숨은 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수많은 이름으로 불려지지만 여기에 연금술사 자신의 무의식의 가장 핵심적인 것이 의식, 무의식간에 투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분석심리학에서 말하는 대극합일의 전체정신, 즉 '자기'일 것이다.

연금술 작업(opus)은 이 최고의 것을 그 원료인 '기본물질'(prima materia), 혹은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덩어리'(massa confusa)에 갇혀 있고 숨어 있는 혼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제련하여 추출해내는 과정이다. 그런데 표면상 물질의 변환과정으로 설명되는 작업은 상징적으로 무의식의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자기를 의식으로 드러내는 자기실현의 과정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연금술사들은 그 최고의 물질이 가진 성질을 물리적 측면뿐 아니라 철학적, 심리적 관점에서도 설명하였고 연금술사 자신의 정신이 물질변화에 끼치는 영향력을 말하기도 했다.

메르쿠리우스는 '현자의 돌'(Lapis Philosophorum)이며, 그 가장 오래된 형상은 용, 특히 자기의 꼬리를 무는 우로보로스로 표시되었다. 그것은 날개 달린 헤르메스 신으로 영혼의 인도자이고, 양성자(兩性者, Hermaphroditus), 남매의 짝, 금속이면서 액체, 물질이면서 정신, 차면서도 뜨겁고, 독이면서 동시에 치유의 약수라고 불렸다. 이 모두는 융의 말대로 바로 대극을 융합하는 상징들인 것이다.

융에 의하면 날개 달린 용은 대지적인 뱀과 공중에서 나는 새의 결합이다. 자기의 꼬리를 무는 용은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듯이 연금술의 작업적 특성인 '하나인 것에서 나와 하나로 돌아가는' 순환의 원리를 표현한다. 메르쿠리우스는 연금술 작업의 마지막일 뿐 아니라 그 시작이기도 하다. 시작과 마지막은 둘이 아니고 하나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연금술의 기본물질과 같다. 또한 그 기본물질에서 시작되는 작업의 첫번째 단계인 '검게 됨'(nigredo)의 과정이라고도 한다.

심리학적으로 우리가 '자기'가 무엇이냐 할 때 그것은 시작이자 마지막이라 한다면 이해가 될 것인가? 처음에 사람들은 좀 놀라겠지만 '시작이 반이다'라는 속담의 뜻을 아는 사람은 "아니, 시작이 전부다"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융이 어린이상을 상징적으로 자기의 상징이라고 본 것은 그것이 아직 분열되지 않은 전체를 포괄하는 하나의 상이기 때문이다. 기본물질은 카오스(chaos, 혼돈)라고도 부르는데 혼돈은 '자기'의 다른 얼굴이기도 하다. 다만 자기는 아직 의식되지 못했다. 그래서 의식화의 작업이 필요하다. 이것이 연금술의 작업이고 그 첫번째 단계가 '니그레도'(검게 됨)인 것이다.

자기가 정적靜的인 형상이 아니라 역동적인 변환의 과정 그 자체라면 작업의 모든 과정에 자기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메르쿠리우스가 기본물질이고 니그레도이기도 하다는 말은 모순이 아니다.

연금술의 변환과정은 대개 니그레도(nigredo, 검게 됨), 알베도(albedo, 희게 됨), 루베도(rubedo, 붉게 됨)의 세 과정에 치트리니타스(citrinitas, 노랗게 됨)가 추가되어 네 단계로 알려졌으나 15, 16세기에 치트리니타스는 탈락되었다고 한다.

니그레도는 처음부터 시작의 물질, 카오스 또는 혼란스러운 뭉치의 성질로 존재하거나 여러 요소가 용해, 분리, 분할, 부패하여 생기는데 이 경우에는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의 대극의 융합이 생기고 융합된 것의 죽음이 생겨 검게 됨의 상태가 된다.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은 흔히 해와 달, 왕과 왕비의 상으로 표현된다. 니그레도의 상태에서 세척(ablutio, baptisma)의 작업을 통하여 알베도로 직행하거나 죽음에서 빠져나온 혼(아니마)이 죽은 신체와 다시 융합하여 생기를 불어넣거나, 모든 색깔을 그것이 포함된 흰색으로 이행시킴으로써 알베도가 이루어진다.

그것은 은색 또는 달의 상태라고 하는데 해가 뜨기 전의 새벽에 해당되지만 니그레도에서 알베도에 이르는 과정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여기까지만 되어도 거의 목표에 온 것처럼 여긴다고 한다. 여기서 노랗게 됨을 거치거나 직접 루베도의 단계로 가는데 이때는 불을 높은 온도로 올림으로써 이루어진다. 이 단계에서 왕비를 대변하는 흰 것과 왕을 대변하는 붉은 것의 화학적 결혼이 이루어질 수 있다. 아니마와의 융합의 과정이다.

폰 프란츠는 니그레도에서 알베도에 이르는 과정을 분석과정에서 외계로 투사된 피분석자의 마음의 끊임없는 성찰에 비유하고 있다. 니그레도는 엄청난 우울상태인 동시에 해리상태로서 사랑의 문제든 공격성의 문제든 투사된 상태에서 겪는 고통스런 상태인데 투사된 것을 되돌려와서 자신 속에서 보도록 하는 끊임없는 노력이다. 연금술에서는 그것이 기본물질을 씻고 증류하고 정화하여 무거운 물질을 버려나가는 과정으로 표현된다. 이런 과정은 우선 밀폐된 연금술의 용기(vas hermeticum)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물질에 갇혀 있는 메르쿠리우스의 상황과 같다.

안에 있는 귀중한 것이 증기가 되어 도망가지 않도록 그릇을 밀폐하고 불을 가해서 지지고 끓이는 것은 한편으로는 관심의 대상을 밖으로 향하지 않게 하고 안으로 돌리는 철저한 내향화의 태도를 표현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무의식의 온갖 갈등을 자신 속에서 해결하기 위해 고통을 감수함을 말한다. 투사가 중단되면 처음에는 답답한 질식상태가 되어 납으로 만든 관 속에 밀폐되어 죽은 고대 이집트 신화의 오시리스와 같은 상태가 된다.

그러나 투사하는 마음이 완전히 정화되면, 즉 투사대상에서 완전히 떼어내서 자신에게 되돌려오는 데 성공하면 감정적 갈등이 완화되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폰 프란츠는 그런 점에서 알베도의 상태는 조용해지는 첫번째 단계로서 객체적 현실에서 철학적으로 거리를 둘 수 있는 고요한 상태가 되어 이제 사람은 합성작업을 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한다고 보았다. 세척은 마치 분석작업과 같고 의식의 태도가 충분히 분석되면 이제부터는 불을 지피면 된다. 그러나 연금술의 니그레도에서는 그러한 세척이 여러 차례 반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분석과정에서도 이 단계는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다. 언제고 우리는 시초의 투사상태, 그림자의 투사, 아니마 아니무스의 투사 때문에 공연한 기대와 실망과 배신감을 겪는다. 이는 자기실현 과정에서 자주 경험하는 일이다.

- 자기와 자기실현 (하나의 경지, 하나가 되는 길) p.164~166/ 이부영 (분석심리학의 탐구 3)


222. 티아레 공개 2013-07-28 22:29

전이를 해소하고자 할 때 우리는 보통 사람에게는 거의 또는 전혀 요구하지 않는 것을 환자에게 요구하게 된다고 융은 말한다. 즉 환자에게 그 자신을 극복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노이로제 환자는 그도 정상적인 사람처럼 분별 있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아니 그는 정상인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유아성幼兒性이라는 커다란 부분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며, 이것은 아무도 정상인에게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환자들은 흔히 갓난아기처럼 있을 수 있다는 확신을 얻으려고 모험을 한다. 치료자는 이때 환자가 그렇게 하는 것을 덮어놓고 막아서는 안 된다고 융은 지적한다. 이성으로는 대치할 수 없고 그저 행해져야할 경험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런 경험이 환자에게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전이의 해소에 있어서 초보자들은 환자에게 충고하거나 암시를 준다. 환자에게는 치료자의 이러한 노력이 편리하므로 해를 끼치게 된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있어서는 "환자와 그의 충동에 우선권을 주고 그것이 이끌어 가는 대로 맡겨야 한다. 그것이 잘못된 길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잘못은 진실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삶의 조건이다."

- 분석심리학 (C.G. JUNG의 인간심성론) p. 278/ 이부영


221. 티아레 공개 2013-07-28 21:33

대극과 대극합일로서의 자기

모든 원형은 밝고 어두운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정신은 대극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정신현상이 대극의 긴장과 갈등과 통합의 과정에서 진행된다. 의식과 무의식, 남성성과 여성성,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정신과 신체, 높고 낮음, 우월기능과 열등기능, 내향과 외향, 합리와 비합리, 강함과 부드러움, 어른과 아이 - 무수히 많은 대극성 속에서 우리는 삶을 경험한다. 대극성은 정신의 원초적 조건이다. 이 가운데서 '자기'는 전체정신으로서 밝고 어두운 면을 그 안에 포괄하는 하나이다. 자기가 대극의 융합, 대극합일의 상징으로 표현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1954년 빅터 화이트(Victor White)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융은 자기의 상징으로서의 그리스도상을 언급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자기는 단일성입니다. 그러나 둘, 즉 대극으로 이루어진 단일성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전체성이 아닐 것입니다.

<꿈에 나타난 개성화 과정의 상징>에서 융은 '자기'는 대극의 합일이며 모든 관계에서 명제와 반명제, 동시에 종합명제를 나타내기 때문에 자기는 절대적인 역설적 논리로 남는 것이며 대극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전체성을 경험할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다. 또한 그 자체가 갈등이며 합일인 자기의 이율배반을 말하기도 했다.

자기는 음양이 합하여 도를 이룬다는 동양사상의 도 개념에 일치된다. 전체성이란 밝은 면만을 가져서는 안된다. 그림자가 함께 있어야 한다. 자기원형의 그림자가 그와 같은 것이다. 자기는 얼핏 보기에 서로 받아들일 수 없는 대극을 한몸에 지니고 있다. 따라서 갈등의 소지를 안고 있고 대극이 서로 상대극을 억누르려 하는 한, 갈등과 긴장은 강해진다. 그러나 대극의 존재와 대극의 갈등을 삶 본연의 요청으로 받아들이고 대극을 철저하게 체험해나감으로써 정신의 전체성, 즉 자기에 도달한다. 그 결과는 대극간의 적당한 타협이거나 하나가 다른 것에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대극을 뛰어넘는 하나의 경지, 융이 초월적 기능이라고 부른 것에 의한 새로운 의식성의 탄생이다.

- 자기와 자기실현 (하나의 경지, 하나가 되는 길) p.59/ 이부영 (분석심리학의 탐구 3)


220. 티아레 공개 2013-07-23 00:39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 실현의 역사이다.
무의식 속에 있는 모든 것은 밖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해한다는 것은 나의 유일한 열망이다.
그러나 내게는 또한 의사의 본능이 있다.
나는 사람들을 돕고 싶다.

우리는 13시간을 그야말로 쉴틈 없이 말했다.
프로이드는 내가 처음으로 만난 참으로 중요한 인물이었다.

정신이란 생의 비밀의 가장 깊은 곳에 속한다.

내가 찾던 인식은 아직 그 당시의 학문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 원초적 체험을 해야 했다.

의사는 인간의 본성을 그의 인도자로 삼고 따라야 한다.
그가 그때 하는 것은 치료라기 보다
환자 속에 있는 창조적인 싹을 성장하게 하는 것이다.

만일 의사가 한 인간을 돕기를 원한다면
있는 그대로의 그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은
내가 한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을 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분석이란 두 사람이 관여하는 하나의 대화이다.
분석자와 환자는 눈을 마주 보고 서로 마주 대하며 앉는다.

압도하는 영혼의 像들과 직면하는 것은 진정한 치료이다.
그것은 자기자신에 이르는 길을 가능케 한다.
결국 치료는 종교적인 문제이다.
왜냐하면 오직 의미있는 것만이 구원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神이 하나의 秘密이며 우리가 거기 관해 말하는 모든 것은
사람으로 부터 나온 말임을 언제나 명심해야 한다.

어쨋든 나는 종교적인 문제를 그토록 자주 다루어 사람들은 내 견해가 영지설이라느니,
무신론이니 유물론 또는 신비주의라고 비난하였다.

종교적 체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커다란 보배, 즉 그에게 삶의 근원,
의미와 아름다움이 되는 것을 간직하고 있다.

카톨릭 교회의 가장 중요한 신비도 인간의 영혼 속에 깊이 뿌리 박고 있는 정신적 조건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나의 소망이다.

한가지는 확실하다: 그것은 영혼은 신과의 관계를 깨닫도록 부여되어 있는 실체의 위엄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만일 그것이 단지 한방울의 물과 바다와의 관계에 불과할지라도, 바다는 많은 물방울 없이는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全一性에 이르는 바른 길은 숙명적인 우회로와 잘못된 미로로 이루어지고 있다.

거기 존재하는 것에 대하여 불평없이 무조건 긍정하는 하는 것,
현존재의 조건을 내가 보는 그대로 - 내가 이해하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내 자신의 본성을 그렇게 내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나는 아무도 'Jung 주의자 Jungianer'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아무런 완결된 교지를 공포하지 않으며 나는 맹목적인 지지자들을 혐오한다.
나는 누구나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사실들을 다룰 수 있도록 맡겨 두고 있다.
왜냐하면 나 역시 자신에게 그러한 자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라 神이 나에게 원하는 일을 하도록 내게 부과되었다는
확신을 나로부터 빼앗을 수는 없었다. 그것이 나에게 모든 결정적인 일에서
내가 인간들과 함께 있지 않고 神과 함께 홀로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 C. 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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