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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하나
 성폭력 생존자의 연애   치유일지
조회: 1031 , 2015-06-10 14:06


1. 연애에 대한 평소의 생각과 지금의 연애 상태

나는 연애에 대해서는 좀 생각이 복잡해요.
하는 애들 보면 하고 싶기도 하다가도,
또 막상 하자니 별로 하고 싶지 않기도 해요.

하고 싶은 이유는,
그냥 그 알콩달콩함이 좋아보이고 사랑받고 싶기도 하고.
남들 다 하니까 나도 해보고 싶고 그렇죠.

그런데 막상 하려면 걱정 되는 게 있어요.
그냥 저번 연애들이 다 안 좋게 끝났어서-
그게 좀 무섭기도 하고.

소개를 받으려고 해도,
아, 내 경험을 이해해줄 만한 사람이 있을까-
이런 생각을 먼저 하게 되고.
그런 사람이 있으면 진짜 딱 만날텐데, 이런 생각도 하고.

어쨌든 그래서 지금은 연애 상대가 없어요.
그냥 혼자, 별로 구하려고 하지도 않는 상태에요.

2. 연애 경험

연애는 두 번 해봤는데
21살때 한 번, 22살 때 한 번.
각각 나보다 4살, 6살이 많았어요.

첫 번째 남친은 프로젝트 팀에서 만났어요.
자유여행 둘이 갔다가 사귀게 돼서 처음엔 엄청 좋았죠.

근데 사귄 지 2주 만에 문제가 생겼어요.
섹스와 관련된 문제였어요.
멀티방에 가서 섹스를 하게 됐는데 질내사정을 한 거예요.
전 완전 깜짝 놀랐고,
다음 날 바로 병원 가서 피임약 타먹고- 집에 일주일 동안 누워 있고.
엄마는 그 사실을 알아서 막 울면서
'너 그런 일 있었다고 막 살려고 하는 거냐'고 그러고.

헤어질까 하다가, 2주만에 헤어지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서
그냥 다음 부터 안 그러기로 하고 다시 사귀었어요.
그 다음부터도 그 문제는 계속됐어요.
계속 콘돔 사용 문제-
저는 그런 문제를 똑부러지게 얘기하거나 화도 잘 못 내고.
그렇게 상처만 받고-

또 그 때가 한창 제가 빚 갚으려고 일 하고 있던 때고
심리 상담도 받던 때여서 더 힘들었어요.

결국엔 못 버티고 헤어졌죠.

두 번째 남친은 상태가 좀 괜찮았을 때 만났는데, 
동아리 선배였어요. 과 선배고. 졸업생이었고.
동아리 선후배 모임 자리에서 저를 보고는 전화번호를 알아서 연락을 해왔더라구요.
그래서 만나게 됐죠.
근데 별로 오래가지도 못했어요.
2주만에 헤어졌나? 

연애를 제대로 잘 해본 것 같지도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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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연애를 하면서 특히 힘들었던 점들

당시에 가장 힘들었던 점 중 하나는, 
내적으로는 자신감이 부족했어요.
나한테 이런 일이 있었는데, 이런 내가- 이런 생각도 들고.
이런 어두운 사람이어서 미안하고.
성폭행 당했다는 사실을 얘기하기가 너무 무섭고.
심리 상담도 그냥 가정폭력 때문에 받는다고 하고.
그러다보니까 서로 이해의 폭이 좁아지는 것 같더라구요.

그것 때문에 많이 힘들었죠.
무슨 문제든 다른 사람들도 다 갖고 있을 텐데,
저는 그게 '내가 성폭행 당해서 그래' 라고 다 환원돼서 문제가 잘 안 풀리니까.
제 스스로 자존감이나 자신감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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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인 부분도 힘들었고요.
그렇다고 막 플래시백이 심하고 그런 것도 아니었지만
딱히 좋거나 편하지도 않았어요.
불편하고-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플래시백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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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여자가 편하겠다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왠지 여자랑 사귀면
내가 성폭행 당했다는 거를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음, 왜냐면 그런 순결 논리도 없을 거고.
내가 성적으로 더럽혀졌다는.
근데 남자들이랑 사귀면 꼭 그런 느낌이 들어서
내가 뭔가 흠집이 있고 가치가 떨어지는 것 같고,
그래서 그런 나를 사귀는 상대방이 좀 불쌍하고 미안하고.
내가 좀 모자란 사람 같아서-

그런 부분에서 힘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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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상대에게 성폭력 경험에 대해 이야기해봤는지. 
 4-1) 했다면, 어떤 생각으로 했는가?
 4-2) 상대방의 반응은? 연애 관계는?
 4-3) 잘 말했다고 생각하는가?

 4-4) 안 했다면, 그 이유는?
 4-5)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는가?
 4-6) 말을 안 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는가?

남자친구한테 직접적으로 그 이야기를 해보거나, 
그런 적이 없어서 직접 무슨 말을 들은 적은 없어요.
어떤 생각을 하는 지도 모르겠고.

만약 앞으로 남자친구를 만난다면 꼭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뭐, 지금이야 이 문제로 별로 할 일이 많지 않아서 그냥 하고 넘어가는 정도겠지만,
그래도 꼭 이야기하고 싶달까-
이걸 이해할 수 있는 사람하고 만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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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성폭력으로 인해서 연애에 불편함이 있는 건-
그냥 연애가 두려워서 잘 시작을 못 한다는 거에요.
두려운 이유는,

그걸 잘 말을 못 하겠고,
말하면 나를 싫어할 것 같고
나를 좋아해주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

사귀기 전에 이야기하면 안 사귈 것 같고
사귀고 난 다음에 이야기하면 막 화내면서 왜 그걸 이제 이야기하냐고 뭐라고 할까봐
그러고 나서 떠날까봐 무섭죠.

여자로서 뭔가 만족을 못 시켜주는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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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관계에서도 그래요.
저는 그냥 밑에 있는 게 익숙한데.
가만히 있는 게 너무 익숙하고,
그것 뿐만이 아니라 성 자체가 별로 안 편하고 안 좋아요.
그래서 그렇게 선호하지 않는데,
그것도 좀 미안해요.
내가 그런 욕구를 못 채워주는 여자친구인 것 같아서? 
여자친구라면 그런 성적 요구를 해소해주는 역할도 해야 하는데
나는 그걸 잘 못해주니까.
나를 쓸모없다고 생각할 것 같고.
아 되게 여자친구 잘못 만났다,
다른 여자 만나고 싶다,
이렇게 생각할 것 같아서 무섭고.

제가 좀 무책임한 것 같기도 하고.
안 좋아도 그냥 대줘야 하나, 이런 생각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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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본인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연애는?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연애는 내가 성폭력 당했다는 걸 인정해주고,
내가 그것과 관련돼서 하는 일들 -가령 이런 레포트를 쓰는 것-,
상담소에서 하는 행사들에 자주 가는 것,
관련 포럼에 가는 거, 자조모임 하는 거,
나중에 이런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 하는 거 등등을 그냥 내 모습으로 받아들여주는 거에요.

보통 사람들은 다그치거든요.
아직도 그러냐, 잊어버려라 등등.
그런데 저는 그러면 못 견뎌요.
잊어버릴 생각도 없고, 오히려 똑바로 마주보면서 더 잘 살게 되어 가고 있는데
그걸 못하게 하거나 인정을 안 하면 잘 지낼 수가 없거든요.

그러면 이제 관계가 비끄덕 대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걸 다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숨기는 것도 싫어요.
내가 내가 아닌 느낌? 스트레스 받고-

뭘 엄청 도와줬으면 싶은 건 아니에요.
사실 실질적으로 혼자 해나갈 수 있는 부분이고-
지금 뭐 도움이 필요하거나 그런 상태도 아니고.
그렇다고 엄청 적극적인 지지가 필요한 것도 아니에요.
지지해주는 사람이나 같이 갈 사람들은 엄청 많이 있으니까.

그냥 필요한 건,
가만이 지켜봐주는 거, 판단 없이? 
그거면 될 것 같아요. 그렇지 않은 사람이랑 같이 있는 게 너무 힘들고 무서워서
남자들을 피하게 되는 것도 있어요.

그냥 확률적으로 남자들은 보통 이런 얘기를 하면 저를 답답하게 봐요.
막 지금쯤이면 이걸 해야지, 그걸 하고 있냐-
이런 식으로. 그게 너무 듣기 싫고, 화가 나고.

그래서 안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사람이랑 그냥 편하게,
가끔씩은 내가 뭘 하고 있는 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얘기도 하고.
같이 나누기도 하고.
그 사람 뭐 힘든 거 있으면 나도 이해해주고-

경험의 폭이 좀 넓은 사람이면 좋겠다 생각해요.
아무리 착해도 경험의 폭이 좁으면 놀라거든요, 이런 일 들었을 때.
쇼크 먹는다고 해야하나?

그게 나쁜 건 아니지만,
제 입장에서는 꼭 좋은 것도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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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앞으로 연애와 관련한 계획이나, 본인의 다짐 같은 것이 있는지?

앞으로는,
개인적으로는 좀 더 남자들과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해보려고요.
지금까지는 늘 남자들을 뭐랄까,
잠재적 연애의 대상으로 놓고 터놓고 지내지 못하고 그런 게 있었거든요.
남자들하고 친구가 되는 경험을 많이 해보고 싶어요.

그러면 좀 더 불편함이 해소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제가 불편한 게, 남자들이 다 잠재적 연애 대상이니까,
뭔가 잘 보여야 될 것 같고
여자로서 흉보이면 안 될 것 같고 그래서 불편한데-

그냥 남자도 여자랑 다름 없이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거를 좀 경험해보고 싶고
그러면은 남자도 편해지고 연애도 좀 편해지지 않을까 싶어요.

한 편으로는 아예 외국에서 한 번 만나볼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국내에서는 아무리 내가 노력해도, 
그런 걱정들을 내 마음대로 떨칠 수 없다면

외국에서는 사실 그런 걱정들이 좀 덜 드니까.
외국에서 한 번 사귀어 보고
그런 걱정 없이 사귀는 게 뭔지 경험을 하고,
(물론 이건 상대방이 완벽하다는 게 아니라 제 내적인 상태를 말하는 거에요)
이렇게 사귈 수도 있구나,
하는 걸 알게 되면 한국에서의 관계도 바뀌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내년에 교환학생을 가게 되면 
거기서 남자친구를 사귀어볼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외국인으로:)

물론 외국인이라고 완벽하지 않다는 건 알아요.
주변에 외국인이랑 만나는 친구들이 있어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차피 사람은 다 똑같으니까.

하지만 상대가 외국인이고, 내가 지금 외국에 있다면
제 마음이 조금 더 편하지 않을까, 해요.
조금, 그 뭐랄까, 한국 사회라는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잖아요.
그 결속력이 조금 더 약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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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성폭력 생존자가 연애하기가 어렵다는 게 심리적인 이유도 있잖아요.
근데 그게 딱 가셨는데, 그 때도 힘들다면 그 땐 그건 사회적인 이유인 거거든요.
사람들이 혀 끌끌 차는 거,
그러면서 하는 말들을 다 피해자들이 듣고,
자기 스스로 내면화 하고,
상대방들도 그런 말을 들으면서 뭔가 생존자들을 꺼리게 되고.

그러면서 그런 어려움이 발생하잖아요.
근데 연애는, 사실 필수는 아니지만, 
그런 '사랑하는 관계', 상대가 남자든 여자든, 어떤 형식이든 
그런 관계에 대한 경험은 박탈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안 하면 안 했지,
못 하는 건 불공평하니까.

그런 점에서 생존자들이 연애에 대해서 자유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먼저 생존자라고 연애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바뀌어야 하고
사람들도 자신의 파트너로 생존자를 거리낌없이 받아들이려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해요.

그리고 그런 편견적인 생각과 발언이 줄어야 하고,
'ㅉㅉ인생 망했다. 시집 다 갔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런 것들이 사라지기 위해서는,
뭔가 여자가 이래야 한다, 남자가 이래야 한다, 남자와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고정된 틀이 좀 느슨해져야 할 것 같아요.

사실 내가 지금 정신이 없어서 힘든 거,
우울해서 힘든거, 그런 것들은 치료를 통해서 어떻게 하면 되지만

사회적으로 그 정신 없음과 우울을 심화시키고 있기도 하고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그런 틀, 그게 있음으로써 내가 거기에 맞출 수 없어서 힘든 거잖아요?

그러니까 여자는 성적으로 깨끗해야 한다, 연인은 섹스를 해야 한다, 
연애는 서로 다른 성끼리만 해야 한다(특히 남자 여자) 등등의 고정관념이 좀 풀려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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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저부터도 뭔가 좀 다른 사람들과의 연애에 가능성을 열어둘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저도 좀 괜찮은 사람하고 연애하고 싶거든요.
잘 자라고, 화목한 가정에서, 돈도 좀 있고. 어두운 면 없는.
제가 그렇지 못하면서 저부터 그런 걸 바라고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아서 내가 부족하게 느껴지는 거죠.

나부터가 그런 생각을 버려야 
변화의 출발이 되는 거고,
또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눈이 바뀌는 거 아닐까 싶어요.


연애가 단순히 개인의 일이기는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사랑'은 굉장히 특별한 '기회'중의 하나인데
그거를 정당한 이유 없이 박탈당하는 것은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적어도 성폭행을 당했다는 이유만으로 
잠재적 연애고자가 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