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C버전 구독관리
공개일기 한줄일기 내일기장
李하나
 완벽주의로부터의 자유   neuf.
조회: 1517 , 2020-11-29 23:02


금요일부터 오늘까지, 주말 동안 서울 나들이를 다녀왔다.
정말 오랜만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친구들을 만나 즐겁게 놀았고,
근래 들어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일단 금요일에는 워홀을 하면서 만났던 친구 S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
캐나다에서 함께 일했던 M과 함께 오랜만에 셋이 모이는 자리였다.
수영이라는 공통된 취미가 있었던 우리는 캐나다에 있을 때 종종 같이 수영장에 가곤 했는데,
내가 한국으로 돌아오기 직전 마지막으로 수영을 한 후, 1년만에 다시 모이는 자리였다.

친구 집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시켜서 함께 먹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을 다 먹고서도 와인을 마시며 수다를 계속 떨었는데
무슨 얘기를 그렇게 했는지 나중에는 목이 다 쉴 지경이었다.

그리고 더욱 기분이 좋았던 건 
내가 상담을 시작하면서 실천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을 시도해볼 수 있었던 점이다.
지난 일기에도 썼듯이, 좋은 상담자가 되려면 부족한 부분을 내보일 줄 알고, 
부정적 감정을 처리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해서 이 부분을 보완해보려고 생각 중이었는데,
마침 이 자리에서 그걸 연습해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실 부족한 점을 잘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고
뭐든지 잘 해보이려고 기를 쓰는 편이다.
잘 지낸다, 잘 하고 있다, 문제 없다, 는 식으로 항상 이야기하고 
힘든 점이나 어려운 점은 숨기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 날은 그냥 솔직하게 표현을 해보려고 애를 써봤다.

예를 들면, 금요일에 대학원 결과 발표가 하나 났는데, 불합격이었다.
원래 같았으면 이런 결과는 숨기거나 그냥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긍정적으로 포장하고 넘어갔을텐데,
이 날은 그러지 않고,

'나 오늘 발표 났는데 떨어졌어, 넘 슬프다, 맛있는거 많이 먹을거야!!'
라고 이야기했다.

이런 약한 모습을 보이면 큰일나는 줄 알았던 나였으나,
친구들은 같이 슬퍼해주면서 오늘 맛있는 거 많이 먹으면서 떨쳐버리자며 나를 위로해주었고
그런 위로를 받으니 친구들과 한층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그동안 내가 대화를 하면서 늘 다른 사람들과 어느 정도 거리감을 느꼈던 게
아마 나 자신의 이런 자연스러운 모습을 숨겨왔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즐겁게 놀고 다음 날인 토요일에는 또 다른 친구들을 만나러 갔다.
요가를 하는 친구가 자기 요가원에서 심리학과 요가라는 흥미로운 주제의 강연이 열린다며
추천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워낙 운동을 좋아하는 편이라 
신체의 활동을 이용한 정신 건강의 증진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요가나 명상에도 항상 흥미가 있었다.

나와 대학 동아리 활동을 같이 했던 친구 2명과 함께 강연을 들으러 갔다.
강연 자체는 요가를 하는 사람들에게 기초적인 뇌과학/심리학 지식에 대해 설명해주는 것이었어서
사실 나에게 새로운 내용은 없었다.
그치만 이렇게 불교 철학이나 요가를 심리학과 접목시키는 시도를 지켜보는 것 자체는 매우 흥미로웠다.

강연을 다 듣고 난 후에 친구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갔다.
저녁을 먹으면서 또 오랜만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어제에 이어서 '나의 부족한 점을 솔직히 드러내고 부정적인 감정도 표현해보아야지' 마음을 먹었다.

모두 진로에 대해 고민이 많은 친구들이라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그 쪽으로 흘러갔고
막막한 미래와 코로나로 인한 힘든 상황들을 공유하게 되었다.
전 같았으면 나는 잘 극복하고 있어!라는 스탠스를 취했겠지만,
그러지 않고 솔직하게 심리학 대학원을 준비하는 것의 어려움, 코로나로 인해 갖게 된 불안 등을 
표현했고 친구들도 여기에 큰 공감을 해주었다.
그동안 나는 대화를 할 때 어느 정도 외부인이라는 느낌이 있었는데
이 날은 힘든 점을 함께 나누고 서로 응원을 하다보니 정말 연결된 느낌이 들어서,
분명 힘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도 기분이 좋았던 것 같다.

그리고 아, 이렇게 힘들 때 같이 이야기할 친구들이 있다면 
인생이 아무리 힘들어도 괜찮겠다, 견뎌낼 수 있겠다, 하는 막연한 안도감도 느낄 수 있었다.

밥을 다 먹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기에,
전 날 S의 집에서 함께 놀았던 M의 집에서 자고 가기로 했다.
이틀을 내리 돌아다니느라 꽤 피곤했는지 금방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눈을 뜨니 9시쯤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 기분이 좋았다.
뜬금없이 왜 기분이 좋았냐고? 
원래 완벽주의에 부족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나 같았으면
새벽부터 알람을 맞춰놓고 일어나서 씻었을 것이다.
왜냐면 부지런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날은 그냥 솔직하게 아 너무 피곤하다, 일어나기 싫다, 이 침대 너무 좋다,
라며 그냥 뒹굴거렸다.
작은 부분에서 어깨에 힘을 빼니 행동과 감정 표현이 자연스러워져서 너무 편했다.

마침 김장을 하는 날이어서 조금 일손도 도와드렸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의 가족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은 시간이었던 것 같다.


.
.

무튼 정말 간만에 너무나 행복한 주말이었다.
별 거 아닌 일상에 왜 이렇게까지 행복감을 느끼는 지 읽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을 지도 모르겠지만,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고 나니,
내가 평생동안 얼마나 작은 것들에까지도 아등바등 해왔는지 나는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이동할 때 몇 번째 칸에 탈 지 미리 정해두고
최소 시간으로 이동하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를 뛰어다니고,
친구 집에 가는 데도 중간에 무엇을 할 지 시간표를 짜놓고
선물로 무엇을 살 지까지 미리 다 정해놓고, 정해놓은 건 무조건 찾아서 사가야했던 내가,

뭐 대충 살지 뭐~~
그냥 걸어 다녀~
아 몰라 못 찾겠어 안 살래~~
하고 아무 생각없이 지냈던 것이다.
특히 못 찾겠다며 포기하고 안 산 건 정말 정말 감격적이었다.

머릿속으로 생각한 선물이 있었는데 찾기 어려워서 
그냥 포기하고 구할 수 있었던 다른 선물을 사줬는데
친구는 그 선물도 좋아해줬다.
내가 생각했던 선물을 사주지 못한다고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었고,
설령 사주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괜찮았던 것이다.


세상에 완벽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두 내가 정해놓은 틀일 뿐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는 것을 깨달은 후 보낸 첫 주말이 
얼마나 자유롭고 편안헀고 감격적이었는지 모른다.
진짜 나 자신을 찾은 기분이었다.

몇 년 동안 나를 괴롭혔던 완벽주의의 족쇄가, 
조금씩 풀려가는 기분이다.

.
.



나는 나를 믿는다.
아무리 남들보다 느리고 뒤쳐질 지라도
조금 더 힘든 일을 겪고
안 좋은 조건을 가져서 
비록 최고의 인생을 살 수는 없을지 몰라도

내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한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늘 이렇게 이뤄질 것이라는 걸
오늘 다시 한 번 깨달으며
내 인생도 이렇게 느리지만 분명히 한 걸음씩 나아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오늘은 더욱 편안한 마음으로,
그리고 좀 더 나 자신에 가까운 자신으로 잠자리에 들어본다.


Judy Moody   20.11.30

우연히 이 글을 봤는데 정말 너무 제 얘기라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요.. 늘 스스로에게 완벽하지 않아도 돼! 틀려도돼! 아무도 뭐라안해! 되새기는데도 여전히 족쇄를 벗어날 수가 없네요...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을까요

李하나   20.11.30

맞아요, 완벽주의가 정말 내려놓기 어려운 것 같아요ㅠㅠ 유튜브 심리상담사 웃따님이 올려주신 완벽주의 특징 및 치료라는 동영상 추천드려요! 완벽주의의 원인이나 특징, 치료를 위한 실천법까지 잘 정리되어 있어요ㅎㅎ 저는 무엇보다 완벽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잠깐 멍,,해졌었어요ㅠㅠ저는 완벽이라는 게 있고 내가 그걸 달성하려면 엄청 노력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는데,,알고보니 다 저 혼자 정해놓고 아등바등하고 있었던 거였더라구요. 사람마다 완벽주의자가 되고, 그게 유지되는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이 영상을 보면 조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