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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320 , 2010-09-20 02:29
글 : 진중권 (문화평론가) | 2010.07.09 l CINE 21.com 




[진중권의 아이콘] 양가죽을 쓴 늑대

정체성과 동일성



















김규항이라는 이가 <한겨레>에 기고한 글에서 진중권을 “진보신당의 당적을 가진 자유주의자”라 불렀다. 그의 구별에 따르면, 진보신당에는 한편으론 “제 정체성을 간직한 당원들, 사민주의적 전망으로 이 추악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진지한 당원들”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자유주의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촛불광장에서 활약한 덕에 당원이 늘었다”고 자랑하나, “그렇게 입당한 사람들이 지금 진보신당을 아예 자유주의 정당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근데 내가 아는 한 촛불당원들은 노선투쟁 같은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의 언급 중에서 “제 정체성을 간직한 당원들”이라는 표현은 ‘사회주의자’를 가리키는 것 같다. 한편 “진지한 당원들”이란 표현은 정체성에는 문제가 좀 있지만 그래도 이 추악한 세상을 변화시키려 해서 나름 갸륵한 ‘사민주의자’를 가리키는 듯하다. 한편, 촛불 때 입당한 당원들은 일거에 ‘자유주의자’로 분류된다. 그들은 계급의 적, 즉 김규항의 표현을 뒤집으면 제 정체성을 잃고 추악한 세상을 그대로 온존시키려고 드는 진지하지 못한 당원이 된다. 아무 데서나 붉은 살 드러내는 이 좌파 바바리맨 쇼는 그냥 웃어넘기자.



흥미로운 것은 ‘자유주의자’라는 표현의 독특한 의미론이다.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와 함께 이른바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근간을 이룬다. 이른바 북구의 사회국가들도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그런데 ‘자유주의자’에 대한 이 생뚱맞은 적의는 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내가 보기에 그것은 80년대 이념서적에 난무하던 어법이다. 이렇게 21세기의 한국을 졸지에 멘셰비키와 볼셰비키가 다투던 러시아 혁명기로 만들어놓았으니, 내친김에 차라리 ‘자유주의자’ 숙청하라고 선동을 할 일이다.



정체성의 폭력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이른바 근대적 강박관념이다. 가령 “제 정체성을 간직한 당원들”이란 표현을 보자. 그는 이들의 정체성이 곧 진보정당의 정체성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이들만으로 진보정당을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할 만큼 그가 편협한 것은 아니다. 정체성에 조금 문제는 있지만, 사민주의자들은 당에 좀 있어도 된다(이른바 ‘견인’을 해서 끌고 가면 되니까). 그런데 왜 진보신당의 당적을 갖기 위해 그의 개인적 정체성을, 혹은 그가 “제 정체성을 간직”했다고 판단하는 그 사람들의 정체성을 받아들여야 할까?



사실 진보정당에 들어온 사람들 중에서 이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회주의가 뭔지는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그 사람들도 모른다고 하고, 사민주의가 뭔지는 직접 유럽에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매우 낯선 개념이다. 촛불당원들은 대부분 그저 한나라당이 싫고, 민주당은 구리고, 그나마 진보정당이 제 취향에 맞는다고 생각해서 입당한 이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지향이 여러 가지 면에서 민주당보다는 좀더 진보적이라고 믿는다. 이런 사람들은 진보정당에 들어오면 안되는가?



여기서 “제 정체성을 간직한”이라는 표현의 폭력성이 드러난다. ‘정체성’(identity)은 동시에 ‘동일성’을 의미한다. 다른 모든 당원들을 제 형상대로 찍어내야 비로소 당의 정체성이 유지된다는 강박관념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차라리 당원 받을 때에 아예 이념조회를 하는 게 낫겠다. “당신은 사회주의를 믿습니까?” “아뇨, 전 공산당이 싫어요.” “그럼 사민주의라도 믿습니까?” “글쎄요. 그게 뭔데요?” “흠, 당신은 어쩔 수 없는 자유주의군요. 민주당으로 가세요.”



“진보신당의 당적을 가진 자유주의자”라는 딱지는 아마도 모욕을 위한 표현으로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게 왜 문제인지 모르겠다. 내가 ‘자유주의자’라는 것은 나를 아는 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 워낙 천성이 리버럴해서 국가가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을 못 봐주는 편이다. 한편, 진보정당에 적을 둔 것은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 특히 강력한 사회 복지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 체제 중에 유럽식 사회국가 시스템을 선호한다. 그래서 진보정당에 남아 있는 것이다.



유학 시절에 만난 독일의 한 여학생은 내가 기독교인이면서 무신론자라는 사실에 혼란스러워 했다.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인이고, 철학적으로는 무신론자이고, 윤리적으로는 쾌락주의자고, 논리적으로는 금욕주의자고, 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자고,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자고, 문화적으로는 무정부주의자다.” 그는 그 모든 규정들이 어떻게 머릿속에서 하나가 될 수 있냐고 물었다. 하지만 정체성을 왜 패키지로 가져야 하는가. 그러는 김규항도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며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예수 족보 팔지 않던가?



진보정당 안에는 다양한 생각이 공존한다. 거기에는 유신론자도 있고 무신론자도 있다. 자유주의자도 있고 집단주의자도 있다. 사회주의자도 있고 사민주의자도 있으며, 심지어 한-미 FTA에 찬성하는 당원도 있다. 선거연합에 찬성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독자후보를 고집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른 당과 통합하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독야청청 나 홀로 걸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진보신당에 정체성이란 게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이 모든 생각들의 총합, 혹은 교차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나는 묻는다



“진보신당의 당적을 가진 자유주의자”라는 표현은 아마도 ‘좌파를 가장한 우파’라는 뜻일 거다. 내가 이런 소리를 듣는 근거는, 중도에 사퇴했다고 비난을 받는 심상정씨의 말도 일단 경청할 필요가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진보신당이 더이상 이대로 갈 수는 없다고 믿는다. 거기에 찬성을 하든 반대를 하든 일단 그로 하여금 말은 말할 수 있게 해줘야 할 터. 이 당연한 요구를 했다고, 남의 이마에 함부로 딱지를 붙여댄다. 도대체 그 딱지 붙이기로써 내 주장의 뭘 반박하려 한 건지 알 수가 없다.



우파가 좌파를 가장해 무슨 영광을 볼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이와 똑같은 비난을, ‘듣보잡’이라는 이름으로 마침내 유명해질 수 있었던 어느 불행한 청년에게도 들은 바 있다. 이 우익 스토커는 내가 한-미 FTA에 대해 반대한 적이 없다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실은 여러 차례 FTA에 반대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아무튼 ‘무슨 말을 했다’는 게 아니라, ‘무슨 말을 안 했다는 것’을 정체성 판단의 근거로 삼는 그 아스트랄함에는 설명하기 힘든 묘한 매력이 있다.



왼쪽과 오른쪽, 서로 방향은 달라도 멘털리티는 동일하다. 그래서 나온 게 바로 ‘포스트모던’의 근대비판이다. 90년대 이후 20년 동안 모두들 나서서 지겨울 정도로 근대를 반성했건만, 이 모든 지적 유행의 물결도 80년대 이념서적을 유일한 교양으로 간직한 고고한 정신만은 전혀 건드릴 수 없었나 보다. 그 포스트모던도 유행이 다 지나 이제 회고를 하는 시절. 그 시점에 마주친 이 비난의 형식(“그는 양가죽을 쓴 늑대다”)은 너무 복고적이어서 그런지 언캐니하게 느껴진다.



글 : 진중권 (문화평론가)
| 2010.07.23 l CINE 21.com 

[진중권의 아이콘] 유물론적 신학에 관하여






유토피아와 좌파 바바리맨



















슬라보예 지젝의 <시차적 관점>을 읽다가 ‘유물론적 신학’이라는 표현을 만났다. 신학과 유물론의 모순적 결합을 지젝은 이렇게 정당화한다. “데리다는 (…) 오늘날에는 오직 무신론자들만이 기도를 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수사법에 반하여 우리는 신학자들만이 유일하게 진정한 유물론자라는 라캉의 주장이 가진 진리를 주장해야 한다.” 이 역설은 일상적인 것이다. 사실 돈의 전능을 인정하는 강남 부자 교회의 목사들이야말로 진정한 유물론자이며, 세상엔 돈보다 중요한 게 있다고 믿는 좌파들이야말로 진정한 관념론자가 아닌가.



하지만 이 흥미로운 모순의 저작권은 사실 지젝이 아니라 발터 베냐민에게 돌아간다. 흔히 ‘역사철학테제’라 불리는 베냐민의 에세이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에는 아직까지도 학자들 사이에 분분한 해석을 낳는 베냐민 특유의 알레고리들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것이 파울 클레의 그림과 함께 등장하는 우울한 역사의 천사, ‘앙겔루스 노부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고 또 아리송한 것이 바로 ‘역사철학테제’의 서두에 등장하는 자동인형의 알레고리다.



유토피아적 발상에 대한 역설



“널리 알려지기를 상대가 수를 두면 맞수를 두어 늘 승리하도록 만들어진 자동인형이 있었다. 터키 옷을 입고 입에 수연(水煙) 파이프를 문 인형이 커다란 테이블 위에 놓인 체스판 앞에 앉아 있다. 테이블은 거울 시스템을 이용하여 안이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그 안에 체스에 능한 등 굽은 난쟁이가 들어앉아 끈으로 인형의 손을 조정하고 있다. 철학에서도 그런 것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사적 유물론’이라 부르는 인형은 늘 승리해야 한다. 그 누구와도 싸워서 이기려면 그것은 신학의 힘을 빌려야 하나 오늘날 신학은 왜소하고 추해져서 들여다보여서는 안된다.”



그 난쟁이의 이름을 베냐민은 ‘신학’이라 부른다. 그 누구와도 싸워 이기기 위해 과학적 유물론은 신학의 도움을 받아야 한단다. 이게 무슨 뜻일까? 지젝의 책에서 ‘유물론적 신학’이라는 표현과 마주치는 순간, 불현듯 내가 5, 6년 전에 어느 인터넷 게시판에 올렸던 글이 떠올랐다. 자기 인용을 통해 그리로 다시 돌아가보자.



이 알레고리에서 등 굽은 난쟁이, 즉 ‘신학’은 곧 유토피아의 철학을 가리킨다. 유토피아적 발상이 없었다면 세상은 오늘날 우리가 가진 것만큼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몇몇 몽상가의 유토피아가 세상을 디스토피아로 만들어버린 경험을 갖고 있다. 여기서 유토피아는 있어야 하되, 동시에 있어서는 안된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베냐민의 자동인형은 바로 그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이리라. 즉 난쟁이(유토피아)는 실제로 작동해야 하나, 그의 작업은 결코 겉으로 드러나서는 안된다.



역사의 텔로스(telos), 즉 인류의 최종 목적이 되는 이상사회를 그려놓고 현실을 강제로 그리로 옮긴다는 발상은 시대착오다. 우리는 이미 ‘역사이후’(posthistoire)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유토피아를 포기할 수는 없다. 우리가 현실로 누리는 것이 한때는 실현 불가능한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이상사회의 꿈은 존재해야 하되 동시에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터키 인형이 되어 하는 말, 쓰는 글, 하는 행동은 유토피아의 열망에 조종되어야 하나, 그 꿈 자체는 난쟁이처럼 가려져 있어야 한다.



존재하면서 부재해야 하는 유토피아



과거의 유토피아는 완성태로 존재했다. 어떤 이들은 이 설계도를 그대로 현실로 옮기려 했다. 하지만 오늘날 ‘유토피아’가 아직 살아 있다면, 그것은 존재하면서 부재해야 한다(데리다라면 ‘존재하는 동시에 부재하면서’ 작동하는 이것을 ‘디페랑스’라 부를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존재하면서 부재하는 것은 과학적으로도 가능한 현상이다. 가령 촉매를 생각해보라. 화학반응에서 촉매는 그 자체론 화학적 결합물에 들어가지 않으나 그것 없이는 화학반응이 일어날 수 없다. 유토피아는 촉매와 같은 것이어야 한다.



내가 좌파 바바리맨을 싫어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21세기에 여전히 긍정적 유토피아 문학을 하는 그 지적 게으름도 맘에 안 들지만, 대중 앞에 옷 홀딱 벗고 빨간 자지, 노란 자지 심판하는 행태는 내 성 취향을 심히 거스른다. 현실은 무섭게 돌아가는데, 거기에 결합될 생각은 하지 못하고, 제 자지 색깔의 원색성을 근거로 남들에게 ‘자유주의자’니, ‘프티 부르주아’니 딱지나 붙이는 것은 그냥 중세적 악습일 뿐이다. ‘종교재판’(inquisition)의 어원은 라틴어 1인칭 ‘내가 묻노라’(inquisitio), 즉 남의 신앙적 정체성을 묻는 질문이었다.



언어 게임에서 ‘유토피아’가 하는 역할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역사에 텔로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에서 어떤 정치적 목적을 설정하는 것 자체가 불필요하거나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유토피아는 구체적으로 터져나오는 사안을 판단하는 데에 나아가 사안에 대처하는 대안을 만드는 데에 은밀히 작동해야 한다. 마치 촉매처럼. 이번 선거를 통해 이루어진 무상급식을 생각해보라. 그것은 사실 그리 급진적인 요구가 아니나, 평등사회의 유토피아를 향한 중요한 한 걸음이 아니던가.



우리는 결코 유토피아에 도달할 수 없다. 그것은 ‘아무 데도 없다’를 의미하는 그 낱말의 뜻 속에 이미 함축되어 있다. 우리는 거기에 그저 무한히 근접할 수만 있을 뿐이다. 그것도 현실에서 유리된 실험실에서 사유하는 한두 사람의 레토르트 몽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씨름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론과 실천을 통해서. 유토피아를 그림에 비유하자면 그것은 삶에서 유리된 정치적 수도원에 사는 몽상가들이 그리는 유화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사는 수많은 이들의 꿈의 조각으로 이루어진 퍼즐이다.



이른바 ‘좌파’에 부족한 것은…



불행히도 우리는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유토피아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언젠가 오랜 세월이 지나 되돌아보면 우리의 꿈이 이미 실현되어 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유토피아의 모습은 한 몽상가의 ‘비전’ 속에서 미리 보이는 것이 아니라, 먼 훗날 투쟁하는 세대의 집단적 꿈속에서 ‘기억’으로 뒤늦게 현현하는 것이다. 유토피아라는 이름의 난쟁이는 거울의 반사를 이용해 등을 구부리고 책상 속에 숨어야 한다. 현실에서 우리는 은밀히 그의 조종을 받는 터키 인형이 되어야 한다.



유물론적 과학이 왜 신학의 조종을 받아야 하는가? 그것은 유토피아의 실현이 과학으로 대체할 수 없는 세속 종교적 신앙,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비합리적 열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지젝은 말한다. “신학적 차원- 베냐민에 따르면 이것 없이는 혁명이 승리할 수 없다- 이 바로 충동 과잉의 차원, ‘지나치게 많음’의 차원이 아닌가?” 사실 광적인 예수쟁이들의 문제는 열정의 과도함에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의 문제는 시도 때도 없이, 아무 데서나, 아무한테나 드러내는 데에 있다. 이는 좌파 신학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신학은 타인을 심판하는 기준이 아니라, 자기를 움직이는 동력이어야 한다. 목소리 높은 좌파들이 번번이 그들이 ‘주사파’라 경멸하는 이들에게 패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른바 ‘좌파’에 부족한 것은, 홍세화 선생이 지적했듯이, 자기를 움직이는 열정이다(지젝은 이를 프로이트-라캉의 ‘충동’으로 해석한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이른바 ‘주사파’들은 자기의 난쟁이를 감춰놓고 터키 인형으로 행동할 줄 안다는 것이리라. 불행한 것은, 그 훌륭한 습성이 심오한 철학적 이해가 아니라 국가보안법의 현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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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1.

왜 열정이 필요한가? 그것은 모든 이성적인 것의 토대는 사실 비이성적인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조례의 올바름은 법률로 판단하고, 법률의 올바름은 헌법으로 판단하나, 헌법 자체를 정당화하는 것은 사법적 논의가 아닐 겁니다. 복잡한 논의니, 이쯤 해 두지요.














"모든 이성적인 것의 토대는 사실 비이성적인 것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모든 의식의 토대는 무의식에 있기 때문이다." 또는
"모든 밝음의 토대는 어두움이다."
"모든 진리의 토대는 거짓이다."
"모든 삶의 토대는 죽음이다."

뭐 이런 '대극합일' 혹은 '중용' 명제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하면 될라나...

아니면 혹시 이 모든 소모적인 논쟁이야말로 라깡의 상징계를 적나라하게 증명해준다고 이해하면 될라나...

재미는 있는데, 씁쓸도 하네요...




글 : 진중권 (문화평론가) | 2010.07.30 l CINE 21.com 

[진중권의 아이콘] 생성의 존재미학

발롯 체험과 '기관없는 신체'


















어느 나라에나 외국인들이 먹기 힘들어 하는 음식이 있다. 필리핀에는 ‘발롯’이라는 게 있는데, 그놈의 정체는 부화하다가 만 반(半)병아리 상태의 달걀을 삶은 것이다. 어제 드디어 길바닥에서 놈을 먹어볼 기회를 가졌다. 먹는 법은 간단하다. 달걀 꼭대기를 깨서 구멍을 내고, 그리로 소금과 소스를 넣어 먼저 액즙을 마신 뒤, 이어서 껍질을 까서 나머지 고형물을 씹어 먹는 것. 먹다보면 씹기 힘든 딱딱한 부분과 마주치게 되는데, 내 생각에는 아마도 태반의 역할을 하는 부위인 것 같다. 맛은 사실 삶은 달걀과 거의 비슷하나, 씹는 느낌이 다르다.



현지인들은 발롯이 삶은 달갈보다 영양가가 더 높다고 말한다. 학교에서 질량 보존의 법칙,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배운터라 이 말이 썩 믿기지는 않으나, 누가 아는가? 실제로 그럴지. 질량과 에너지는 동일해도 장에서 소화되는 정도에 차이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무튼 내가 먹었던 것은 부화 18일째 된 발롯이다. 초보자는 대개 이걸로 시작한다. 진짜로 먹기 힘든 것은 부화 21일째 이후. 이놈의 껍질을 벗기면 그 안에 이미 깃털이 난 병아리 태아가 들어 있단다. 이번에는 소프트코어에 그쳤지만, 다음에는 21일짜리 하드코어에 도전해볼 생각이다.



‘된다’는 동사가 지배하는 구간



사람들은 아무 거리낌없이 달걀을 먹고 치킨을 먹으면서, 왜 유독 발롯에 대해서만 거부감을 느끼는 걸까? 200년 전에 되게 할 일 없는 어느 철학자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까지 심오한 철학적 성찰을 내놓은 바 있다. 독일 관념론의 대가 헤겔. 그는 개구리나 올챙이와 달리 그 둘의 중간, 즉 다리와 꼬리가 동시에 달린 놈은 왜 혐오스럽게 느껴지는지 묻는다. 이어서 대답하기를, 그것은 그놈이 온전히 개구리의 규정에도, 그렇다고 온전히 올챙이의 규정에도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헤겔이라면 아마 발롯에 대한 거부감 역시 같은 방식으로 설명했을 거다.



이는 헤겔의 <미학강의>에 등장하는 예다. 헤겔의 미학에 따르면, 어떤 것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자신의 ‘이념’(규정)에 가장 잘 합치하기 때문이다. 제 이념을 가장 잘 보여주는 놈, 가령 말을 예로 들자면, 말 중에서 가장 말다운 놈이야말로 아름답다는 얘기다. 반면 말의 이념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하는 놈(가령 비루 먹은 말)은 아름답지 못하다. 때로 아예 합치해야 이념이 마땅찮은 것들도 있다. 가령 ‘아직 개구리가 아니나 이미 올챙이도 아닌 것’, ‘아직 병아리가 아니나 이미 달걀도 아닌 것’ 등이다. 그런 대상에 대해서는 아예 혐오감을 느끼게 된단다.



헤겔의 이런 설명의 바탕에는 ‘존재는 생성에 우선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가령 달걀이 병아리가 된다고 할 때, 헤겔이 선호하는 것은 두개의 명사, 즉 ‘달걀’과 ‘병아리’다. 그가 못 참아하는 것은 그 둘의 중간, 즉 ‘된다’는 동사가 지배하는 구간이다. 그런데 생명의 활동에서 가장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이 구간이 정작 헤겔에게는 혐오스럽게 여겨진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사물을 확립된 정체성(‘이념’) 안에 묶어놓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강박을 엿보게 된다.



이도 저도 아닌 존재는 ‘언캐니’하다. 그것에 대한 헤겔의 거부감은 이해할 만하다. 그것은 거의 자연적 본능에 가까운 반응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 그런 중간적 존재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문화도 있잖은가. 가령 필리핀 사람들은 발롯에 전혀 혐오감을 느끼지 않는다. 외려 그것을 계란보다 더 좋아한다. 따라서 생성의 단계에 있는 중간적인 존재에 대한 혐오는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일 것이다. 그러니 이참에 헤겔의 발상을 뒤집어보는 건 어떨까? 마치 마르크스가 유물론적 변증법을 얻기 위해 헤겔을 물구나무 세운 것처럼.



기관없는 신체로의 ‘창조적 역행’



아무리 변증법적 ‘운동’을 강조한다 해도, 헤겔은 결국 ‘존재’의 철학자다. 그에게 ‘생성’이란 ‘아직 덜 된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관점을 뒤집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생성’을 ‘되다가 만 존재’로 규정할 게 아니라, 외려 ‘존재’를 ‘활동하다 멈춘 생성’이라 부르는 거다. 한마디로 존재를 생성의 우위에 놓는 태도에서 벗어나 생성을 존재보다 더 근원적 사건으로 바라볼 수는 없을까? 철학에서 이는 곧 플라톤주의에서 니체주의로 사고를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포스트’라는 접두사를 달고 80, 90년대를 풍미했던 철학들이 한 일이 바로 그 작업이었다. 실은 발롯을 먹으면서 속으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발롯의 내부는 ‘계란 반(액즙) + 병아리 반(고형물)의 상태’. 이것이 그만 들뢰즈의 ‘기관없는 신체’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기관없는 신체에선 각 기관들이 자유로이 횡단하고 교차한다. 그것들의 역할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에선 입이 항문의 역할을 한다. 귀가 색을 보고, 눈이 소리를 듣고, 입이 냄새를 맡는다. 랭보는 소리에서 색깔을 보았고, 칸딘스키는 형태에서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이 공감각의 능력은 그들의 몸의 한구석에 아직 기관없는 신체가 남아 있음을 의미한다.



‘기관없는 신체’는 일종의 존재미학으로 제기된 것이다. 사회는 개인에게 하나의 정체성을 가지라고 요구한다. 개인은 사회라는 거대한 신체 속에 하나의 기관(직업 혹은 역할)으로 명료하게 분절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자는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자’일 뿐이다. 이 점에 관한 한 전통적 좌파나 우파나 차이가 없다. 이른바 ‘포스트’의 담론이 겨냥하는 것이 바로 근대라는 시대의 쌍생아가 공유한 그 공통의 지반이다. 여전히 사회를 기계에 비유해야 한다면, 기계에 대한 관념을 산업혁명적인 것에서 생명공학적인 것으로 바꿀 필요가 있지 않을까?



들뢰즈는 항상 생성의 상태로 존재하라고 요청한다. 즉 이미 분화를 마친 하나의 기관으로 만족하지 말고, 자신을 그 어떤 기관으로도 분화할 수 있는 잠재성의 상태를 유지하라는 얘기다. 이미 하나의 정체성으로 분화를 마친 신체를 다시 모태 속의 태아로 되돌리는 것은 퇴행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더 큰 창조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 가령 70여개의 서로 다른 인물이 될 수 있었던 페소아를 생각해보라. 그야말로 인간 줄기세포가 아니었던가. 기관없는 신체로 돌아가는 것은 진화론적 퇴화가 아니다. 들뢰즈는 그것을 ‘창조적 역행’이라 부른다.



헤겔의 눈에 올챙이+개구리가 징그럽게 보이고, 이방인의 눈에 달걀+병아리가 역겹게 보이듯이, 자신을 기꺼이 정체성으로 분화시킨 신체들은 정체성없는 신체에 거부감을 느낄 것이다. 그 거부감은 때로 적대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런 이들에게 아예 기관없는 신체가 되라는 들뢰즈의 요구는 스튜디오에 외국인 데려다가 억지로 발롯을 먹이는 만행(필리핀에선 이 방송의 인기가 높단다)과 비슷할지 모르겠다. 세계를 바꾸려는 이들도 제 신체를 바꾸기란 어려운 일. 눈 딱 감고 발롯을 씹어 삼키는 고역 따위와는 애초에 비교가 되지 않을 거다.



이렇게 반박할지 모르겠다. “아무리 ‘생성’이니, ‘잠재성’이니 떠들어도, 달걀의 가능성은 단 하나, 닭이 되는 것이다. 발롯이 되지 않았다면, 그 달걀은 부화하여 결국 닭이 되었을 것이다.” 사실 모든 비유는 불완전하게 마련. 그런 의미에서 약간 수정을 하자면, ‘기관없는 신체’란- 결국 닭이 된다 하더라도- 상황에 따라 70여 가지의 서로 다른 개체로 변신하는 닭일 것이다. 혹은 동일한 알에서 때로는 닭이, 때로는 참새가, 때로는 악어가, 때로는 공룡이 나오는 그런 경우에 가깝다고 할까? 올챙이에 영감받은 헤겔처럼, 나도 발롯 먹으며 되게 할 일 없어 생각해봤다.

asarabyo


 
글 : 진중권 (문화평론가) | 2010.08.06 l CINE 21.com 



 [진중권의 아이콘] 촛불은 왼쪽에서도 오른쪽에서도 깜박인다

 시차적 상황과 계급모순

















‘시차’란 특정한 천체가 관찰자의 위치에 따라 다른 곳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가령 지구에서 특정한 별의 위치를 관측한다고 할 때, 그 별의 위치는 지구가 공전궤도의 한쪽 끝과 다른 쪽 끝에 있을 때 각각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천문학자들은 이를 이용해 지구에서 그 별까지의 거리를 측정하곤 한다. 시차는 우리의 일상에 속하는 현상이기도 하다. 가령 무대 중앙에서 노래를 하는 가수가 왼쪽 관객에게는 오른쪽 배경 앞에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고, 오른쪽 관객에게는 마치 왼쪽 배경 앞에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페미니스트, 생태주의자, 그리고…



천문학의 ‘시차’란 관찰 위치에 따른 대상의 ‘상대적’ 위치 변화를 의미한다. 그저 주관적으로 다르게 보일 뿐 대상 자체가 객관적으로 위치를 옮기는 것은 아니다. 슬라보예 지젝이 말하는 ‘시차적 관점’(Parallax View)은 이보다 더 복잡한 현상을 가리키는 것 같다. 가령 양자역학에 따르면 관찰하는 행위가 대상의 상태를 변화시킨다. 즉 동일한 대상이라도 관찰자 A와 B가 볼 때 각각 객관적 상태 자체가 달라진다는 얘기다. 쉽게 말하면 무대 위의 배우가 실제로 왼쪽에서 볼 때에는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볼 때는 왼쪽으로 자리를 옮기는 격이랄까?



천문학의 ‘시차’에는 논리적으로 어려운 점이 하나도 없다. 관찰자 A와 B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외려 그 차이 덕분에 관찰대상이 되는 천체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확정할 수 있다. 하지만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A와 B의 시차는 종합에 이를 수가 없다. 거기서 얻어지는 것은 동일한 대상에 대한 서로 다른, 나아가 서로 모순되는 두개의 기술뿐이다. 물리학에서 빛을 입자이자 파동으로 규정하는 것 역시 같은 경우에 속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른바 ‘인간의 조건’이라는 벽에 부딪히게 된다. 철학자 칸트는 이를 ‘이율배반’이라 불렀다.



정치에 관한 담론도 이와 유사한 곤혹스러움을 낳곤 한다. 가령 사회주의자들은 사회를 두개의 적대적 계급으로 나눈다. 이른바 ‘계급 모순’을 중심으로 사고를 하는 그들에게 때로는 페미니스트들의 투쟁이 배불러 보일 것이다. “대부분의 프롤레타리아 여성은 먹고살기조차 힘들고, 먹고살 만한 배운 여자들이 소일거리로 하는 운동은 당연히 부르주아적 한계에 갇혀 있게 마련이다.” 이게 어디 사회주의자들만의 생각이겠는가? 언젠가 개혁당의 유시민씨가 “해일이 몰려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며 당내 여권주의자들을 질타하는 것을 본 기억이 있다.



하지만 하나의 눈에 그저 ‘조개’만큼 사소한 것이 다른 눈에는 ‘해일’만큼 중대한 사태일 수 있다. 가령 페미니스트들은 사회를 두개의 성으로 나눈다. 이른바 ‘성적 차별’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그들의 눈에는 사회주의자들의 투쟁 역시 때로 남성 독재의 또 다른 형태로 보일 거다. 아주 오래전에 이 잡지의 취재팀장을 지낸 최보은씨는 운동권 출신이었던 당시의 남편이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한다고 당당하게 폭로했다. 우연히 술자리에서 만난 그는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선 진보일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이런 현상은 도처에서 볼 수가 있다. 가령 생태주의자들을 생각해보자. 그들은 세계를 ‘인공과 자연’으로 나눈다. ‘자연 대(對) 인간’의 대립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이들에게 좌우의 문제는 그저 부차적 대립, 결국 자연정복의 산물을 어떻게 나눠먹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좌파는 그 산물을 사회적으로 분배하자고 주장하고, 우파는 그것을 사적으로 소유하자고 주장할 뿐, 자연을 ‘자원의 보고’로, 착취의 대상으로 보는 데서는 둘 다 공범관계에 있다는 얘기다. 가령 몇년 전 수돗물 불소화를 둘러싸고 벌어진 생태주의자와 사민주의자의 논쟁을 생각해보라.



입장에 따라 달라지는 세계



흔히 ‘포스트모던’이라 칭해지는 여러 담론의 바탕에는 강한 무정부주의적 성향이 깔려 있다. 무정부주의자의 입장은 어떤가? 권력과 개인의 관계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그들에게 아마도 좌와 우의 대립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닐 거다. 그들에게 사회주의나 자본주의나 어차피 근대적 권력이 낳은 쌍생아일 뿐이다. 물론 사회주의자들은 최종적으로 국가의 소멸을 말한다. 하지만 현실사회주의는 유감스럽게도 그 어느 체제보다 강력한 국가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사실 민주를 위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요하다는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자기가 가진 입장에 따라 세계는 달라 보이게 마련이다. 물론 저마다 자기의 가치는 ‘해일’만큼 중요하며, 거기에 비하면 다른 문제들은 ‘조개’만큼 하찮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모든 입장의 차이를 넘어 정말로 중요한 가치는 무엇일까? 유감스럽게도 그것을 판정해줄 객관적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경우 철학에서는 흔히 ‘통약불가능성’에 대해 말한다. 다시 말해 이들 입장을 서로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게 해주는 공통의 지반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 제 입장이 바로 그 공통분모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무지막지한 독단이리라.



말로 상대주의를 선언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문제는 현실이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한다는 데 있다. 어떤 가치가 진정으로 중요한지 말해줄 객관적 기준 없이 우리는 살기 위해 선택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선택을 대체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까? 또 그 선택이 선택되지 않은 다른 입장들에 부당한 것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려운 것은 이런 물음에 대답하는 것이다. 가치의 다원성을 인정하면서도 실천에서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는 길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아마도 지젝이 말한 ‘시차적 관점’이 그 해답이 될지 모르겠다.



촛불을 생각해보자. 전통적 좌파에게 촛불집회는 그저 부르주아적 한계 내의 자유주의 운동일 뿐이다. 그들의 눈에는 촛불대중이 자기들 오른쪽에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촛불대중을 광장으로 부른 이유 중 하나는 ‘쾌락’, 즉 어떤 상부의 지시 없이 권력이 미치지 않는 해방구에 순수하게 자발적으로 모인 데서 오는 즐거움이었다. 이 무정부주의적, 자율주의적 욕망의 주체들은 외려 자신들을 지도하려 드는 전통 좌파들이 자신들의 오른편에 있다고 느꼈을 거다. 실제로 촛불대중은 현장에서 운동권식 지휘에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사유의 새로운 습관



전통 좌파는 촛불대중이 오른쪽에 있다고 느끼고, 촛불대중은 외려 전통 좌파가 오른쪽에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이는 동일한 현상에 대한 주관적 느낌의 차이에 불과한 게 아니다. 촛불대중이 전통 좌파의 오른쪽에 있는 상황, 그리고 전통 좌파가 촛불대중의 오른쪽이 있는 상황은 주관적 평가라기보다는 사태에 대한 객관적 기술에 가깝다. 촛불대중은 ‘실제로’ 전통 좌파의 오른쪽에 있고, 동시에 전통 좌파의 왼쪽에 있다. A가 B의 왼쪽에 있으면서 동시에 오른쪽에 있다는 것은 일종의 이율배반이다.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시차적 상황이다.



여기서 “A도 옳고, B도 옳다”고 말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현실에서 이 두 입장이 때로 첨예하게 대립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빛이 동시에 파동이자 입자다. 하나의 규정이 다른 규정을 부정하나, 그러면서도 둘 다 빛에 대한 올바른 기술이다. 시차적 관점이란 이렇게 서로 충돌하는 두 입장을- 마치 힘껏 당겨 묶은 활줄처럼- 그 팽팽한 긴장 속에서 함께 유지하는 사유의 새로운 습관이다. 그것이 얼마나 실천적으로 효용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A만이 옳다’, 혹은 ‘B만이 옳다’는 독단보다 우리를 현실에 더 가깝게 데려가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