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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실현/ 이부영   심리학
조회: 6549 , 2012-07-09 16:45
자기원형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사람 자신이 되게끔 하는 인간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근원적 가능성이라면, 자기실현은 이러한 가능성을 자아의식이 받아들여 실천에 옮기는 능동적인 행위를 말한다. 여기에는 자아의 결단과 용기와 인내심이 필요하며 이것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무의식과 의식과의 합일이 가능해진다. 자기원형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상징을 보내서 자아로 하여금 전체로서의 생을 발휘하도록 촉구한다. 때로는 저절로 의식에 충격을 가하여 창조적인 인격의 변환을 초래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자기실현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 하는 데는 대부분 각 개인의 태도 여하에 달려 있다. 자아가 무의식에 관심을 두고 그 뜻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상징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

자기실현은 다른 말로 개성화Individuation 라고도 한다. 진정한 개성을 실현한다는 뜻이다. 그 사람 자신의 전부가 된다는 뜻이다.

개체가 사회적 평가나 사회적인 이상상理想像 에 맞추어 살기만 하면 그는 필연적으로 자기소외 또는 자기포기에 빠지게 된다. 그는 다만 외부적인 역할이나 집단적인 이상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는데, 자신의 내적 추구, 자신의 개성을 소홀히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성화 또는 자기실현은 첫째로 집단정신과 나의 삶의 목표를 구별하는 데 있다. 이와 같은 구별은 하나의 자각된 인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결코 집단정신, 페르조나Persona를 부정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개성이라든가 개성화라는 말을 쓰면 곧 사회규범을 무시하고 세속을 떠난 초속적인 세계에서 고고한 생을 누리거나 아니면 개인지상주의Individualism를 말하는 것처럼 오해되기 쉽다. 그러나 개성화Individuation는 개인지상주의와는 다르다. 개인지상주의는 집단적 고려나 의무에 대하여 고의적으로 자기의 개인적 특수성을 강조하거나 내세우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이런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더욱 강하게 집단에 의지하고 있다. 1970년대에 전 세계를 휩쓸었던 히피 운동이나 현대 사회의 청소년들의 그럴싸한 철학으로 꾸며진 반규범적 행동은 흔히 이런 종류의 개인지상주의에서 나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시대정신의 개혁에 어떤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개성화는 개체의 특수성을 충분히 고려한 바탕 위에서 집단적 규범의 보다 나은 충족을 가능하게 한다.

자아의식의 형성과 강화 및 페르조나의 형성은 한 인간의 성장 과정에 필수적인 초기의 발전 과정이며, 개성화가 그 사람의 전체를 실현하는 것인 이상 그의 모든 정신세계에는 페르조나도 포함되어 있다. 다만 자기실현은 자아가 사회적 역할과 맹목적으로 동일시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자아성숙의 궁극적인 목표가 페르조나가 아니라는 자각으로 나의 사명과 집단정신을 구별하되 사회적 의무와 규범의 필요성을 자기의 전개성全個性에 합치되는 범위에서 인정하며, 때로는 능동적으로 사회에 참여하고, 때로는 여기서 물러나 안의 세계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실현은 통속적인 의미의 성인, 군자나 도사를 만드는 과정이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가 사회가 만들어준 '성인, 군자, 도사'의 '탈(페르조나)'이기 쉽다. 자기실현은 간단히 말해서 농부를 농부로, 서양인을 서양인으로, 한국인을 한국인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자기실현이 되면 될수록 그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의 모습을 갖출 것이다. 그렇다고 반드시 원만하고 선하다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속하여 있는 사회의 윤리관에 비추어 그는 때로는 이기적이라는 평을 받고, 때로는 냉정하다는 평을 받고, 때로는 일관성이 없다고 비난을 받을지 모른다. 때로는 무한한 정열로 이웃을 돕고, 때로는 권력의 도가니에서 싸우고, 금욕과 정욕에 사로잡히며 고민하고, 때로는 질투와 증오의 감정으로 허덕일 것이다. 다만 그의 머리에는 집단적 투사에 의하여 생기는 명성이라는 후광後光이 없고, 구태여 스스로 그 후광을 만들고자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만일에 누가 그것을 만들어 씌워 주면 그는 또 구태여 거부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것이 인생에서 대수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평범하나 분수를 아는 사람이다. 그는 그가 해야 할 바를 마음속에 물으며, 이해관계에서 그것이 그가 가야 할 길이면 그렇게 간다. 비록 그가 그것 때문에 대인관계에서나 세속적인 삶에서 손해를 보게 된다 하더라도. 그는 진정으로 고독한 사람일 수도 있다. 또한 그는 세속적인 의미에서 진정으로 무력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와의 일치라는 점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강하다 약하다 하는 의식을 그는 가지지 않는다. 그는 반성할 줄 알며 그런 의미에서 종교적인 인간이다. 무엇이 나의 갈 길인가를 항상 마음속에 물으나 그 해답이 늘 분명하지 않음을 알며, 때때로 인간은 그 불분명한 혼돈 속에서 찾아 헤매는 고통을 겪어야 하며, 그러나 그 물음과 찾음에 응답이 있을 것임을 믿는다.

자아의식이 사회적 역할과 의무에 얽매여 무의식의 세계와 단절되면 개인적 무의식의 내용들은 점차 집단적 무의식의 신화층의 영향을 받아 고태적 신화적 색채를 띠게 된다. 이것이 투사되면 대인관계의 갈등은 평상시보다 엄청난 강도를 지니게 된다. 신화적인 그림자가 투사되기 때문이다. 만일 그러한 무의식의 내용이 투사됨이 없이 안에 머물러 자아의식을 점차 동화해 가면 의식의 변화가 생겨 자아가 신화적인 인물과 동일시하여 이른바 마성인격魔性人格이 된다. 자아는 초인적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끼고 스스로 영웅이나 구세주가 된 것 같은 기분으로 행동한다. 이런 현상을 자아의 팽창Inflation 이라 한다. 이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면 온 중공군이 전멸하며 천 리 밖을 환히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고 믿는다"든가 별안간 "내가 예수다"라고 느끼고 밥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고 믿는 정감장애나 분열증 환자의 과대망상에서도 볼 수 있지만, 건강한 보통 사람이 종교적인 체험으로 자기에게 인류를 구제할 수 있는 능력과 사명이 부여되어 있다고 믿고 그렇게 행하는 경우도 자아팽창의 한 예이다.

이와 같은 자아의 팽창은 결코 자기실현의 참다운 경지가 아니다. 여기에는 의식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아팽창은 때로 정신적인 경우뿐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위험한 결과를 초래한다. 서양의 역사 속에는 자기원형상의 하나라 할 수 있는 '그리스도'와의 동일시가 초래한 수많은 비극적 희생이 기록되어 있다. 동양의 종교적 수행과정에서는 이러한 자아의 팽창이 일어나,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라 설익은 깨달음밖에 이루지 못했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성인이나 도사처럼 자부하는 경우를 본다. 융은 선의 깨달음이 진실이냐 아니냐를 따지지 말고 그 사람이 깨달았다 하면 이대로 받아들이자고 하였지만, 이것은 융이 동양의 지혜를 깊이 사랑한 나머지 그 현실에 어두웠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동일시(그리스도 모방Imitatio Christi)를 자기실현의 한 방편으로 삼은 기독교에 비해서 항상 인간의 마음으로 시선을 돌려 스스로의 마음을 반조反照케 한 동양의 종교는 자기실현에 훨씬 더 적절한 것이었다는 말은 수긍이 간다.

어쨌든 자기실현을 하는 데 있어서 첫 번째 해야 할 일은 자아가 덮어씌운 '페르조나'를 벗기는 일이며, 두 번째는 자아를 무의식의 내용의 암시적인 힘에서 구출하는 일이라고 융은 말한다.

"사람이 자기성찰과 그것에 맞는 행동을 통해서 자기를 의식하게 되면 될수록 집단적 무의식에 중첩된 개인적 무의식의 층은 사라진다. 그리하여 하나의 의식이 생기게 되는데, 그 의식은 이미 작고 개인적이며 예민한 자아세계Ich-Welt에 갇혀 있지 않고 보다 넓은 세계, 객체Objekt에 참여하고 있는 의식이다." (C. G. Jung)

이러한 의식은 나의 조그마한 공명심, 이기적인 욕망과 희망과 기대에서 벗어나 사적인 것이 아닌 '객체Objekt인 세계와 결부된 관계기능'이라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겪는 갈등은 개인적인 욕심에서 오는 갈등Wunschkonflikte이 아니고 나와 다른 사람이 함께 겪는 어려움이다. 즉 집단적 무의식을 발동시키는 집단적인 문제들이다. 그러므로 엘곤Elgon 원시림에 사는 엘곤족은 그들에게 큰 충격을 준 꿈은 혼자 가지고 있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고 한다. 그 꿈이 모든 사람에게 관련되는 의미 있는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자기실현은 무의식을 의식화함으로써 가능하다. 교육 분석은 그 적극적 시도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이미 말한 것처럼 자기실현은 결코 유쾌한 작업이 아니다. 때때로 자아의 욕구나 의지에 반해서 실천되는 것이다.

원시사회의 성인식Initiation이나 샤머니즘 사회에서의 주의呪醫(샤먼shaman)의 입무식이 어쩔 수 없는 소명에 의해서 고통과 죽음과 재생의 과정을 밟아야 하듯이, 현대인의 자기실현도 개인적인 욕망과 이익을 어쩔 수 없이 희생시켜야 하는 때가 있다. 자아는 반드시 이것이 자기실현에의 소명이라 느끼지 않는다. 대개는 잘못을 사회나 배우자나 직장에 투사한다. 때로 인간은 특히 현대의 도시인처럼 어떠한 오락으로도 구제할 수 없는 지독한 권태에 빠진다. 민담民譚에 이러한 정신적 상황은 곧잘 "왕이 늙고 병들었으며, 그에게는 아들이 없다"거나 괴물이 사람들을 잡아먹으며, 큰 홍수나 가뭄이 계속되어 무엇인가 해결책이 강구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전개된다. 우리들의 꿈에도 이러한 각박한 상황이 제시되는 경우가 있다. "마치 우리의 마음속에 대인大人이 가까이 다가와 먼저 그 그림자를 던지듯이.

무의식의 내용을 깨달아 나가는 단계에 누구에게나 일정한 공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의 구조에서 말한 여러 가지 내용들, 즉 그림자, 아니마, 아니무스의 의식화가 이루어져야 비로소 그 개체에게 전체의 실현이 가능해진다. 그림자의 의식화는 비교적 쉬운 편이므로 성숙한 단계의 사람이라 할 때는 대개 여기까지는 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림자가 나의 친구가 되느냐 적이 되느냐 하는 것은 순전히 나(자아)에게 달렸다." 그림자는 우리에게 윤리적 갈등을 일으킨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며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이냐 하는 의문 사이에서 방황하게 된다. 융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에는 집단규범에 의한 도덕적 규준이 있고, 이와는 다른 그 개체의 원초적인 양심Urgewissen이 그 무의식 속에 있다. 이것은 바로 자기원형의 윤리적 측면이다. 이 두 가지를 판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꿈은 우리에게 어느 정도 그 방향을 제시하지만 언제나 뚜렷이 가리켜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왕왕 우리는 사회적 선악관과 내적인 충동의 양극 사이의 방황을 감수하고 진정한 내적인 양심의 향방을 찾아가야 하는 때가 있다. 그림자는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서 소화시킬 때 우리의 친구가 된다.

그림자 다음에는 남성은 사랑과 감정의 분화, 여성은 정신적인 지혜의 발달이라는 과제 앞에 서게 된다. 맹목적인 본능적인 사랑, 불모의 논리성에서, 보다 성숙한 통합된 사랑과 지혜로의 분화을 지향하게 되는 것이다. 남성으로서의 우월감이나 여성으로서의 열등감, 합리적 사고에 대한 과도의 집착 또는 감정에만 치우칠 때 아니마, 아니무스의 의식화를 통한 분화작업은 어려움에 부딪힌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자기실현은 일반적인 원칙을 따르지 않으며 개인에 따라 그 과정과 그때그때의 과업이 달라진다.

이렇게 무의식의 의식화가 진행되면 결국 무의식성이란 없어지고 완전히 깨달은 상태가 되어 전인全人이 된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무의식은 끝없는 세계이다. 아무리 의식화해도 미지의 세계는 남아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자기Selbst는 언제나 '나(자아)'를 넘어선다. '나'는 오직 그 커다란 원 속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자아가 자기를 알 수는 없다. 그러므로 융은 자기실현은 반드시 완전해지는 것perfectness이기보다 비교적 온전해지는 것completeness이라고 한다.

자기실현은 한 인간의 과제일 뿐 아니라 전 인류의 과업이다. 그런 뜻에서 그것은 역사와 시대의 사명이기도 하다. 극소수의 사람들이 긴 인류의 역사에서 거의 완성에 가까운 자기실현을 성취하였다. 사회에 따라서는 자기실현을 억압하고 유일절대의 원칙 밑에 개성을 누르는 집단도 있다. 그러한 전체주의 경향이 한 시대를 지배하는 때가 있는가 하면, 자기실현에 적합한 풍토를 제공하는 시대와 사회도 있다. 자기실현을 막는 규범적 교조적 권위주의 사회에서는 오히려 자각된 인간들이 사회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며 때로는 박해의 대상이 되는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나 몰이해가 자기실현의 귀중한 조건이 되는 수도 있다. 그것은 보다 성숙되기 위해서 먹어야 할 쓴 약이다. 상업주의의 문화, 매스컴의 집단암시, 그 밖의 집단적 행동은 모두 개성화를 저지한다. 집단은 그 성원에거 똑같은 생각과 똑같은 행동을 하기를 강요한다. 자기와 비슷하지 않으면 불안해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손에 손을 잡고 '사이좋게' 어린 시절의 단꿈 속에서 잠들고자 한다. 개성화는 이와 같은 긴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개체나 집단이 다같이 고통을 겪고 때로 사회적 물의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모든 개인이 자기실현을 하면 하나의 이상적인 성숙한 사회가 실현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이상이다. 인간의 무의식 속에 근원적으로 개성화 과정이 존재하고 그것이 의식이나 사회 환경과 관계없이 자동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라면, 언젠가 인류의 역사에는 그러한 시대가 올 것이다.


- 이부영 <분석심리학 - C. G. 융의 인간심성론> p.135~141